장가계

장가계 여행기 9

수암11 2006. 9. 7. 15:42
 

장가계 여행기 9



장사에 저녁 8시반경 도착을 해서 조금 늦은 저녁을 먹습니다.


가족들 모임여행이다 보니 나름대로 건전해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한국 성인문화가 발달되지 못하다 보니, 바깥에 남성들이 단체로 나가면 오버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가족단위로 오다보니 조금은 밋밋하지만 건전합니다.


고작 하는 게 심심풀이 화투와 가벼운 소주한 잔이지요.



마왕퇴



내일 일정은 호남성 박물관의 마왕퇴유물을 관람하고, 열사공원을 잠시 들렀다가 귀국 비행


기를 타게 됩니다.



일정상 점심은 기내식이 될 듯합니다.


장가계 관광 마지막 날입니다. 12시 40분 장사 출발 비행기를 타야 하므로 오늘 일정은 좀


서둘러야 합니다.


맨 먼저 관람하게 될 호남성 박물관의 마왕퇴유물은 사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


로 유명합니다.


관람도 시간에 쫓겨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였으되 이천년이 넘은 수 천점의 생생한 유물이


당시의 생활 전반에 걸쳐 전시되어 하나하나가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설명을 상세히 듣지 못한 게 무척 아쉽습니다.



너무나 방대한 자료이어서 사전 지식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물론 저는 직접 와보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호남성 박물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한 소개는 많은 책으로 또는 인터넷에도 수


없이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1972년에 발견되어 세인을 놀라게 한 이 마왕퇴는 살아있는 듯 한 여인의 유해가 나와 세


계적으로 화제를 모았었습니다.


이곳에 묻힌 사람이 기원전 194년에 대후(玳候)로 봉해졌던 이창(利蒼)의 부인임이 밝혀졌


습니다. 


이창은 서한시대에 장사승상 이였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국 한나라 때의 이 무덤은 발굴 당시 보존상태가 완벽하였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이


3000 여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칠기가 500 점, 병기 38 점, 죽간과 목간 922 점, 견직품 100 여점, 목용 266


점, 죽기 100 여점 등입니다. 이 밖에도 청동거울, 나무로 만든 머리빗, 거북모양의 술잔 등


진귀한 기물이 출토되었습니다.


21세기 전으로 돌아간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유물은 상태가 무척 양호한데다가 기록이


나 전설로 전해지던 품목까지 다량 포함되어 보는 사람의 눈을 의심케 하는 대단한 문화재


들 입니다.



이렇게 유물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 20겹 이상의 옷으로 싸여진 시신과 견고


하게 만들어진 4겹의 목관, 그리고 그 바깥에 5톤 이상의 숯과 숯 위에는 1m이상을 덮은 석


회층으로 공기와 습기를 완전히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아울러 석회 위에는 물이 스미지 않는 점토로 밀봉을 하고 역시 수밀성이 높은 황토로 마감


을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시신 보호가 가능 하였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미이라의 피부가 탄력은 지니고 관절이 움직일 정도로 상태가 양호 하지만, 내장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적출 하여 조사를 거친 후 알코올이 가득한 유리병에 분리해서 보


관되어 있습니다.



출토 당시 관내에는 20센티미터 깊이의 무색의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그 냄새는 고


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발굴 속어로 흔히 시쳇물이라고 부르는 액체를 가이드는 지금도


성분을 알 수 없는 당시의 방부제로 표현 하였습니다.



좀 길긴 하지만, 인터넷의 자료로 설명을 대신해 봅니다.


아울러 잠옷에 해당되는 ‘소사단의(素紗單衣)’는 매미 허물 같이 얇은 옷으로 무게가 겨우


48g이며 소매와 목둘레의 비단을 떼어버리면 겨우 25g에 불과한데 현대에서도 재현이 불


가능하다고 알려집니다.



『마왕퇴



1. 마왕퇴 발굴의 서막



중-소 분쟁이 한창이던 1971년 말,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 구릉지에서 병사들이 부상병용 방공호를 파고 있었다.


약 10m 가량 굴을 파고 내려가자 갑자기 밀가루 반죽 같은 딱딱한 진흙 더미가 나타났다. 병사들은 드릴로 이 진흙 벽을 뚫어보기로 했다.


흙더미를 뚫고 들어갔던 드릴을 다시 밖으로 빼내는 순간, 구멍에서 갑자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찌르는 냄새의 기체 한줄기가 솟아올랐다.


때마침 담배에 불이 붙어, 펑 하는 요란한 폭발음이 터졌다. 역사적인 고분 발굴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다.


이 심상치 않은 발견은 즉시 호남성과 공산당 중앙당에 보고되었다.


호남성의 고고학자들은 이듬해인 1972년 1월 고분 발굴에 돌입했고 발굴단은 기원전 2세기 전한 시대 제후국인 장사국의 승상이었던 이창(利倉)이라는 사람의 부인, 아들이 묻혀 있는 무덤 3기를 확인한다.


4개월 후 1호 고분에서 여인의 미이라가 출토되자 상황은 극적으로 치닫는다.


2000 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패하지 않은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열악한 발굴 장비보다 고고학자들을 힘들게 한 것은 공산당 간부들의 횡포였다.


지역의 유지와 그 가족들의 특권을 위해서 한 밤중에 고고학자들에게 관을 열고 시체를 꺼내라는 군사명령이 하달되는가 하면 시신을 덮은 비단이 두부처럼 손상되기 쉬운데도 칼로 잘라내어 얼굴을 확인하자는 등 무리한 요구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또한 그들의 요구대로 호남성 박물관에 미이라를 안치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파로 인해 박물관 기능이 마비가 될 정도였다 한다.


질서 없는 민중들과 일부 정치 세력은 귀부인을 봉건시대 착취세력으로 규정하고 손상하려 하였으며 심지어는 낡을 것을 타파하기 위해 귀부인의 화장(火葬)까지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 주은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귀부인의 미이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당시 총리인 주은래는 이 일을 상당히 아쉽고 애석하게 생각하여 손이 닿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압력을 무릅쓰고 귀부인을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고 위대한 중국 문화로서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2. 마왕퇴 1호 고분의 귀부인



귀부인의 미이라는 키가 약 1.54 미터이고 체중은 34.3 킬로그램이었다.


출토 당시 관내에는 20센티미터 깊이의 무색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그 냄새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1)


시체의 피부는 방금 죽은 사람처럼 윤이 나고 매우 탄력적이었다.


귀부인은 20벌의 의복과 포단으로 싸여 있었으며, 9개의 비단 끈으로 묶여 있었다.


머리에는 여러 가지 장식을 달고 있었는데 머리숱은 많지 않았고 가발로 얹은머리에는 비녀가 꽂혀 있었다.


얼굴에는 견직물을 두 벌 덮어두었다.


두 손에는 자수를 한 향주머니가 쥐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향초(香草)가 가득 들어있었고 발에는 청색 실로 뜬 신을 신고 있었다.


몸에는 '신기수(信期繡)' 가 새겨진 비단옷을 입고 겉에 모시옷을 입었으며 그 겉에 여러 가지 옷과 견직물로 18겹을 감았다.


제일 밖에는 비단으로 아홉 줄을 가로 동여매고 그 위에 다시 황색과 홍색의 수놓은 비단을 덮었다.


귀부인의 미이라는 호남 의과대학에서 해부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시체는 외형상으로 완벽하게 보존되었고 내장기관까지 아주 완전하며 몸속의 혈관구조가 뚜렷하고 경골조직과 연골조직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미세한 일부 현미구조도 찾아볼 수 있었다.


즉, 이 미이라는 2000년 간 긴 시간동안 불가사의할 정도로 보존상태가 훌륭했다.2)


이렇게 보존상태가 좋았던 것은 무덤 속에 백고니(白膏泥)와 목탄을 쌓아 두었기 때문이다.


백고니와 목탄으로 인해 무덤이 외부와 완전 격리되고 밀폐 공간 안에 지하수와 미생물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상태로 2000년 간 무덤 안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해 준 것이었다.


병리학적 조사를 진행한 결과 귀부인은 여러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판명되는데 주로 심장병과 동맥경화, 다발성 담결석 등의 병이 있었다.


귀부인의 나이는 50세가량이고 지방이 풍부했으며 피부에는 욕창3)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급성 질병으로 죽은 듯 했다.



미이라의 식도와 위, 대장과 소장에 모두 138쪽 반의 참외 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귀부인은 참외를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고, 사망 시기는 참외가 익을 무렵으로 짐작된다.


이외에도 검사를 통해 제 4요추의 간격이 좁아지고 폐의 좌상부위에 결핵병소가 있으며, 오른쪽 팔뼈가 골절된 적이 있고, 직장과 간장 속에 편충, 요충, 주혈 흡충 등 기생충의 알이 있으며 현대인보다 체내 수은 함유량이 수백 배 많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누구도 귀부인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 결론짓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질병으로 추측해 담석통(膽石痛)으로 인한 심장병 발작이 사인일 것으로 보고 있다.



3. 전한 귀족의 생활상


귀부인의 체내에는 상당한 양의 납과 수은이 쌓여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한 대 귀족들은 불로장생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연단(煉丹) 기술이 이미 성행하여 대부분의 귀족들이 선단(仙丹)4)을 복용하였다.


선단은 주로 수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용한 뒤에는 만성으로 중독되었다.


전한 초기에는 급성 중독으로 사망하게 할 수 있는 염화 제 2수은이 아직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지만 수은화합물의 경우 부식작용이 강하다.5)


때문에 로마제국이 납중독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처럼 전한 귀족들도 수은 중독으로 인해 건전한 몸과 정신을 소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이라만이 이 위대한 발굴의 전부가 아니다.


출토된 유물 중 최고 수준의 발굴 성과로서 함께 나온 견직물(비단)이 있는데 이 믿기지 않을 유물들은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상태이다.


견직물은 동물성 섬유로서 햇빛·공기·균등에 노출되면 쉽게 손상되어 후대까지 전해지기 힘들고, 때문에 지금까지 출토된 견직물들은 상한선이 후한시대이며 그나마 수량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주은래의 배려로 전 중국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의 기술로 견직물 복원에 성공하여 우리들에게 보이고 있다.


유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은 역시 비단에 그린 백화(帛 )로서 중국 미술사에 서 가장 빛나는 예술품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T자형 비단그림은 관을 덮고 있었는데 선명한 대비와 화려하고 세련된 색채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백화는 천상·지상·지하 세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중간 중간에 무덤 주인공인 귀부인의 생전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무덤 안에 들어있는 부장품들과 대량의 장례도구는 그 양도 엄청나지만 질적으로 따져 봐도 가히 현대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하다.


이 무덤의 주인인 귀부인은 당대 최고급 귀족이었으며 죽간·병풍·화장대와 용(俑)6) 등 사용했던 도구들도 수준급 이다.


여기서 귀부인의 생전 생활 모습을 약간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죽간에 써진 것을 보아 기본적인 소양을 가졌으며 많은 양의 용을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생전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던 신분이었다.


부장품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칠그릇과 술잔을 비롯한 그릇 등 생활용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자일지라도 굶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지전(紙錢) 등 돈을 함께 부장한 것은 염라대왕7) 및 저승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뇌물로 보인다.



4. 고대 중국인의 생사관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의식, 즉 장례처럼 오랜 기간 불변하는 풍습도 없다.


인간의 의·식·주가 세월이 지나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스타일을 전부 버리더라도 그 지역의 장례양식만은 최후까지 남는 것이다.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매장문화를 통해서 그 사회를 바라보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고대 중국인들의 종교는 조상 숭배였다.


인간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그 혼은 저승에서 살아 있을 때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 판결을 받는다고 믿었다.


반면에 백은 무덤 속에 그대로 남아서 후손들이 차려주는 제물을 받아먹고 살았다고 믿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혼이 저승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49일로 보고, 백이 무덤에

서 사그라지는 기간을 3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사망에서부터 49일 동안 후손들은 정성껏 제사를 해서 혼이 지옥의 무서운 벌을 피할 수 있게 하고 3년간 백을 살아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 봉양하여 해골에 붙은 살과 같이 고이 썩어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제사가 잘못 되었다거나 제사를 모실 아들이 없다면 그 혼백은 악귀가 되어 악의와 증오에 가득 차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게 된다.


그 때문에 고대 중국인들은 매장문화를 살아있을 때만큼 거창하게 하였다.


살아 있을 때 는 죽음을 피하고 젊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선단을 복용했고 죽어서는 오랫동안 썩지 않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술력으로 부패방지처리를 하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왕퇴에서 나온 귀부인의 미이라는 그 기술력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승에서도 이승의 관례가 통한다고 믿어 저승의 관리에게 돈을 바치고 좀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나 죽어서도 굶지 않도록 살았을 때 사용하던 그릇, 음식, 옷 등을 충분히 넣어주는 후장(厚葬)문화가 발달했다.


비록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물질주의에 찌들어 고대 중국인들이 죽은 자에게 바치는 공경과 인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발굴과 함께 나온 부장품들을 통해 당대를 바라보고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남겨준 유산은 참으로 가치 있다 하겠다.



1) 이 액체는 발굴 속어로 흔히 시쳇물이라고 부르는 액체이다.


시쳇물에 따라 아주 깨끗한 정화수도 있는데 최고의 보약으로 손꼽히기 때문에 인부들은 서로 마시려고 다툼까지 벌인다.


반면에 독성이 심한 것도 있어 발굴단 전체가 무덤 주인이 생전에 앓았던 병이 옮을 수 있다. 마왕퇴 1호 고분의 액체는 후자에 속한다.



2) 중국에서 이렇게 훌륭하게 보존된 시체는 찾을 수 없다.


신장 지역에서는 건조한 기후로 인해 마른 시체들이 발견되지만 동부지역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


호북성에서도 초나라 무덤에서 시체가 발굴된 적이 있지만 시기적으로 마왕퇴보다 이르다 해도 그 보존 상태는 좋지 못했다.



3) 병상에 오래 누워 있는 환자의 등·허리·어깨·팔꿈치가 바닥 면과 접촉되어 생기는 피부 상해.


4) 광물성 독약을 300℃ 이상의 화로에 넣어서 속까지 빨갛게 되도록 달군 다음 꺼내어 가루로 만든 것.


5) 수은은 흡수되면 신장에서 농축·배설되어 세뇨관에 장애를 일으키며, 이뇨(利尿)의 경향이 나타나지만, 설사·구토·탈수·쇼크 등으로 인하여 무뇨증(無尿症)이 되고, 요독증(尿毒症)에 이르러 죽는 경우가 많다.


만성인 경우에는 구내염·설사·신경염·파킨슨양진전(樣振顫)·빈혈·피부염 및 치육(齒肉)의 색소침착(色素沈着) 등이 나타난다.



6) 인형이라 보면 거의 맞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순장의 흔적으로 생전에 고인을 모신 신하·하인들의 모형을 만들어 함께 묻어서 저승에서도 모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용으로는 진시황의 병마용이 있다.


7) 염라대왕은 몹시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으로 묘사되는데 겉모습과는 달리 법 이전에 인정을 살펴 되도록 많은 혼이 구제 받길 원한다고 한다.


때문에 구제 받을 길 없는 최흉 최악한 자가 앞에 끌려와도 그 가족이 일정 기간 동안 죽은 자를 위해 사찰에 공양한다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면 형벌을 감해주며 고마운 말을 건네준다고 한다.』







'장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가계 여행기 11 (후기)  (0) 2006.09.11
장가계 여행기 10  (0) 2006.09.07
장가계 여행기 8  (0) 2006.09.07
장가계 여행기 7  (0) 2006.09.07
장가계 여행기 6  (0) 2006.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