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1
한동안 퇴마니 뭐니 하여 세간의 관심을 끈 일이 있었다. 새삼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몸이 불편해서 처가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겠냐는 의사를 거절했더니 요즈음 TV를 통해 신작영화를 볼 수 있는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프로그램을 딸아이가 다운받아 주었다. 그 내용은 신부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마(驅魔)의식을 다룬 영화였다.
구마의식과 관련된 영화소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과장되게 다룸으로써 상당히 자극적이다. 수련을 하다보면 불가분 이 세계와 상당부분 겹치게 된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아주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별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고 공포스럽기 까지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세계가 육신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며 단지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겹쳐 있을 뿐 거의 교류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전혀 교류가 없을 수는 없다.
몇몇 예컨대 여말에 살았던 계연소 장군이나 일본 천리교의 천리왕(델리왕) 등은 조금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영대가 맑은 사람들은 영들을 칼라로 보기도 하는데 가령 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사고 난 위치를 즉각 알아차린다. 그 이유는 가드레일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지박령들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젊은 친구는 분당에 놀러 왔다가 새마을 연수원 부근의 절에 놀러 갔는데 대웅전에는 가지 않고 삼신각(?)에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이 대웅전에는 잡귀들이 우글거려서 오히려 삼신각이나 칠성각 이런 곳이 낫다고 하였다. 다른 한 분은 새마을 연수원 앞 버스 정류장 육교 부근에서 웬 젊은 여성이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무단횡단을 하는데 교통경찰이 그걸 보고도 모른 척 하기에 이상하게 생각을 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오직 자신의 눈에만 띄는 현상이었다고 토로하였다.
영대가 맑은 사람들은 상갓집에 가서도 고충이 적지 않다. 망자는 이런 사람을 쉽게 알아보기 때문에 이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 한다. 가령 상가에는 만나기 힘든 조문객들이 방문하기 마련인데 이때 망자가 상에 놓이는 음식까지 간섭하려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본인이 주인공으로서의 손님 대접을 충실히 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당사자가 망자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때 만만한 영대가 맑은 사람은 곤혹스럽기 까지 한 것이다.
반면에 수련단계가 높은 사람은 망자와 대화를 쉽게 이어가기도 하는데, 조금은 특별한 경우가 있었다.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모친은 살아계시고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야기 중에 의견충돌이 일어났는데, 부모의 이야기가 서로 달랐다. 물론 부부 간에는 직접대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자식을 통해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의견이 엇갈리자 각자가 서로의 주장에 대해 좀 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죽은 망자와의 논쟁이라니...
영의 세계에서는 영력이 큰 사람이 좌장역할을 한다. 영력은 정신력이라고도 할 수 있고 기력이 뒷받침이 된 정신력이라는 표현이 더 가깝다. 영의 세계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어렵지만 사람에게서 오직 육신이 제거된 상태로 보면 된다. 그 세계에서도 조직폭력배처럼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패악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는가하면 대부분 제자리를 찾아 가지 못한 영들은 선량하다. 자살한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데, 막상 사후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다가 밝은 빛을 보고 살려달라고 하지만 그 어떤 능력자도 다시 살려낼 수는 없다. 그 세계에서는 빛으로 통한다. 수련을 오래한 사람들의 몸에서는 밝은 빛이 나므로 그 빛을 쫓아서 오기도 한다.
대개 영대가 맑은 사람들 가운데 접신이 잘 되는 부류들은 서로 간에 잘 알아보는 편이다.
이론적으로 사람이 지닌 세포 하나하나에 하나의 영이 접신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영들이 한 사람에게 접신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지만 많아야 수백 명 특별히 많으면 수천 명인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금은 다중인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사실 발현이 되지 않더라도 접신이 된 경우에 무척 고통스럽다. 우선 두통을 동반하기도 하며 원인을 몰라 심인성, 혹은 신경성으로 진단을 내리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한때 접신과 발현에 대해 치료하던 한 분의 이야기로 대부분의 질병의 반은 영적인 문제에서 오는 무병(巫病)이라는 논리를 제시할 정도로 심각하게 표현하셨다. 당시 일선 지도자들에게 한시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는데, 불가피하게 영을 도광(道光)으로 태우면 쓰레기를 태우는 악취가 진동을 하곤 했다. 물론 나쁜 영이라 할지라도 도광으로 태워 소멸시킨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으로 특별한 명분이 필요하거나 극히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일을 겪지 않으며 평생 모르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야기의 소재꺼리로 삼을 필요가 없겠지만 나이를 먹고 너무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도 소통에 걸맞지 않는 일이어서 중언부언 하는 것이니 혜량 바란다.
특정 단체의 수장으로 있거나 계셨던 분들 가운데 제법 알려진 분들 몇몇은 각고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지만 사실은 일종의 접신수련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것이며 추종자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접신 상태라고 하면 특별한 상황으로만 받아들이려 하는데, 수련이나 수행 과정에 마음이 앞서면 심마에 빠지기 십상이다. 수련의 정도가 높으면 그에 상응하는 뛰어난 영력을 지닌 영체가 들어오게 된다. 예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던 우리는 도문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걸맞은 영을 받아드려 철학관이라도 채려야 하지 않느냐하는 우스개를 한 적도 있었다.
수련을 하면서 접신된 경우는 물론 발현으로 이어져 소동이 벌어진 여러 인상적인 경험은 적지 않다. 그 경험들은 대개 그때그때 우리끼리 공유했을 따름이지 이렇게 외부에 노출시킨 적은 없었다. 피해 당사자가 존재하고 남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인데다가 남의 이야기여서 그런 듯하다. 하지만 잘못된 지식이 진실인 양 세상에 퍼뜨려지고 왜곡시킨다면 조금은 바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령관념(精靈觀念)은 어린아이들의 사고관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적 입장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정령관념(精靈觀念)이 차력이라는 독특한 무예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되었으므로 예전 차력수행자들이 ‘순수한 우리의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 이유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한편은 과도한 정령관념(精靈觀念)이 의식세계에 자리 잡고 있음으로, 특히 과거에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일사(2003: 70)는 영(靈)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은 행동양식을 취하는데 누구나 죽으면 영체가 된다. 육신이 없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으로 떠 받들 기도하게 되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영의 세계에서는 영력이 힘이자 권력이며 이 영력은 기본적으로 심력과도 많은 관련이 있으며 영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장과 관련된 처방을 내리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마약은 영력을 약하게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물질인데, 마약을 통해 보이는 환각은 말 그대로 환각인 경우도 많지만, 오랜 마약류의 섭취를 통해 약해진 영력을 틈타 주변의 영들이 장난을 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일사, 2003: 32-35).
접신은 영력이 약해서 발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가장 큰 원인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영력이 약해서 일어나는 경우, 영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정신력이다. 영력을 좌지우지하고 얼마든지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신력이다. 나약한 정신력이 의존심을 부르고 그 의존심이 못된 영을 부르게 된다고 하였다(일사, 2003: 200).
가장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공포가 바로 무지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 비해 보이지 않는 영들은 더 거짓말을 밥 먹듯이 많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극히 제한된 극소수가 그러하다. 대부분은 사후의 제자리를 찾아 가며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빌붙어 사는 극소수가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갈 곳을 찾지 못하지만 선량한 영들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힘들다 보니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살길을 찾아 때가 묻으면서 점점 변하는 것이다. 망자들이 오직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에게 공덕을 쌓는 일이 있다. 그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 줄 때 정성은 받을 수 있지만 실제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정성은 귀신이 받고 제물은 사람들이 나눠 먹음으로써 공덕은 인간이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소위 일월사자라고 하는 저승사자들은 계제가 상당히 높지만 그들을 위해 차리지 않은 제물에는 손을 댈 수 없다. 그래서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사자밥이라고 해서 따로 상을 차려 내는 것이다. 제물은 구색을 모두 갖출 필요는 없다. 정성이 들어가면 되는 것이고 먹어보지 않은 치킨이나 피자도 무방한 것이다.
채널러를 통해 보면 꼭 망자만이 접신되는 것이 아니라 드물게 생령(生靈)도 있다. 생령은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영이 접신되는 것으로 나는 2번의 사례에서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비승비속의 주문 수련하는 자인데 자신이 데리고 있던 신도 비슷한 나이든 여인이 자신의 곁을 떠나 우리 수련을 하게 되자 앙심을 품고 쫓아 온 것이었다. 다른 경우에는 사이비 비슷한 개신교와 관련된 단체의 목사가 채널러를 통해 나타난 것인데 모두가 욕심에 눈이 멀어 벌어진 일이었다. 특이한 것은 비록 생령이지만 낯선 자리에서도 지신이 목표로 하는 사람은 즉각 알아보는 것이었다.
희귀한 사례 중에 하나로 일종의 지신(地神)이 있었다. 이 경우는 접신된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해서 채널러를 통해 불러 본 것이었다. 도반 중에 일본의 천리교단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게 어떤 존재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부른 것이었다. 처음 부르니 영매자 몸에 실렸는데, 얼마나 목이 뻣뻣한지 가관이었다. 무심코 오기는 왔는데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나 아주 거만을 떨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리교에서 믿는 천리왕(델리왕)이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일종의 지신이었는데 사람들에 의해 하도 떠 받들다 보니 짐짓 자신이 일본을 창조한 창조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역할은 교단의 핵심 간부들의 꿈에 현몽을 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지시하고 이끄는 역할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확인된바가 없이 순수하게 델리왕의 진술 그대로이다.
신이한 능력
일부 접신된 상태의 사람들은 신이한 능력을 드러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의적으로 접신된 사람들에 의해 보여지는 신차력이나 수차력이다.
(전통차력과 관련된 자료는 김영만, 박근태(2011)의 논문을 참고로 하였다.)
신차력(神借力) 역시 신차력을 얻음으로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에 대해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수련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노력들이었다. 특히 귀신의 도움을 얻고 귀신의 힘을 빌린다는 자체가 남의 이목을 피할 수밖에 없는 행위이다. 신차력은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동공부를 통해 타력(他力)을 빌려 물리적인 체력을 얻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신차 가운데 산에서 닦는 산차(山借)가 있다(정재승, 1992: 163).
여기서 신차를 얻는 사람을 통령자(通靈者)라 하고, 그 힘을 얻는 것을 통령(通靈)이라 한다. 통령은 신령스러운 힘을 통하여 그 힘을 체험, 습득하여 자유로이 사용하는 것이고, 신차는 신령의 영험력을 통하여 신이(神異)로운 힘을 부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개념은 차력신앙과 동시에 정령관념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村山智順, 1990: 393-394).
이 신차력은 스스로 원해서 영력이 강한 귀신과 통령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극도로 끌어내는 방법이다. 전문적인 신차력 수련을 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접신을 통해 변화된 모습들은 놀랍기까지 하다. 접신사례를 보면 대체로 20대로 추정되는 미혼여성이 발현된 경우, 여러 성인 남성들이 팔다리를 잡아가며 진정시키려 해도 역부족인 사례(일사, 2003: 243)가 있으며(이 현장은 나도 직접 목격을 했다), 주행 중인 레미콘 차를 머리로 들이받고도 죽지 않으니까 뒤에 오는 봉고 차를 또 들이받았는데 차체만 움푹 찌그러지자 혼비백산한 운전사들이 명함만 주고 도망치다시피 했고, 결국에는 경찰 스무 명이 동원되어 잡았다는 사례가 있다(민경환, 1997: 255-256, 주인공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이다). 전문적으로 신차력(神借力)을 익히지 않은 접신만으로도 간접적인 신차력의 위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위험성 또한 그에 못지않다. 이러한 신차력을 통한 수련이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은 생길지 모르나 결국은 자아를 상실하여 스스로도 제어불가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신차력과는 다소 괴리가 있으나 예전 접신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무당들의 작두타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주강현(1997: 148-151)은 면도날 이상으로 날카롭게 신문지가 썩썩 베어지는 시퍼렇게 갈아놓은 작두날 위에 버선을 벗고 맨발로 작두를 타는 무당들의 작두타기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이 불가능 하다고 한다. 설령 신발을 신고 올라선다 하더라도 작둣날에 잘릴 정도인데다가 오히려 날을 날카롭게 세워야 발을 베지 않으며 무당들은 작두를 타는 순간에 발바닥이 뜨거워진다고 하였다.
스스로 원해 얻어지는 신차력은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담보로 잠재력을 끌어내게 됨으로 특히 다른 차력에 비해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신차력을 익히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신력의 증강은 그에 상응하는 영력의 대상과 접신이 이루어짐으로써 폭발적인 힘을 얻게 되며 그런 만큼 위험성도 배가된다.
수차력(水借力)은 대단한 고통을 수반하게 되며 행하려는 사람들의 수도 매우 적다. 물속에 철분이나 동(銅)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을 때 철분이 몸에 들어가면 근육이나 뼈대가 모두 쇠와 같이 튼튼해지고 구리가 들어가면 사람이 동상과 같이 단단해진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박종관, 1990).
수차력은 주송(主誦)수련과 마찬가지로 귀신을 보게 되고 싸움을 통해 담력을 키워나가는 과정이나 힘이나 특정한 능력을 얻는 과정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정신력은 매우 강화되지만 이후의 수련에 있어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귀신이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단전이 열려 보게 된다. 하단전, 중단전의 순서로 도태된 이후에 상단전을 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상단전을 먼저 열게 되면 그 이상의 수련진전은 매우 어렵다. 상단전을 먼저 열게 되면 영안(靈眼)이 열리는데, 흔히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알게 되어서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안은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원치 않는 것도 볼 수밖에 없어서 때로는 고통스럽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볼 수 있는 방법은 수련을 통해 도안(道眼)을 열 수 있어야 한다(황풍, 2000: 165).
그리고 부가되는 주송(主誦)수련은 신에게 끌려 다니게 되는 사술(邪術)일 뿐이며 결코 신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는 정도(正道)가 아니므로(박문기, 1995: 74) 신(神)에게 부림당하는 사술을 행하면 그게 비록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라 해도 뒤가 좋지 않다고 하였다(박문기, 1995: 101).
뛰어난 능력을 얻기 위해 과도한 욕심에 치우쳐 전후를 살필 겨를이 없이 선택을 하기 때문에 ‘접신은 질병인 동시에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다.(일사, 2003: 26). 신통력을 얻어서 눈에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고 없던 능력이 생겨나면 무언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듯한 느낌이 드는데, 평소에 억눌려 있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무언가 남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갈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영적인 질환을 신의 선택이라 착각하게 되고 그것이 일종의 질병이라는 생각은 못 하게 된다(일사, 2003: 22). 이런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신이(神異)한 능력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 뿐 아니라 당사자들도 구체적으로 소스를 밝히기 꺼리게 되어 대부분 계보가 전해지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약차력은 쇠나 구리의 강한 기운을 빌리는 유감주술 경향이 농후하다. 약차력에 관한 약방문은 다양하며 여기저기서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금속이 포함되거나 매우 비싸서 구하기 어려운 약제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처방들마다 복용량도 구체적이지 않다. 그리고 약을 복용하는 것만으로 차력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력, 특히 기차력(氣借力)에 수반되는 약물들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하동인(1992: 178)이 소개하는 차력약의 하나인 장근제(壯筋劑)는 오히려 논리적인 측면이 있다. 그 대강은 소화기를 튼튼하게 하여 영양과 약의 성분을 잘 흡수할 수 있게 기본 체력을 향상시킨 다음, 심장과 신장의 기능을 도우는 약을 써서 몸 전체의 조화를 향상시키고, 목적에 따라 특수 부위를 더 강건하게 보완하는 방법을 쓰면서 간장에 부담이 가지 않는 약을 처방해서 복용한다 하였다.
차력약이나 부적은 《국선도법》(부제: ‘仙’은 생명의 길, 청산거사, 갑인년: 449-451)에 소개되어 있고,《단학비전》(하동인, 1992: 178-182)에 오행정지환(五行定志丸)의 방문과 장근제(壯筋劑) 복용사례, 《산약신서》(류상채, 1977: 610)에 대화환이 소개되어 있으며, 구암(1998.05:27)은 작고한 권태훈옹이 장군음(將軍飮)이라는 차력약을 썼다고 하였다(건강도원, 1998년 5월호).
구리를 차력약으로 쓰면 사람에 따라 얼굴이 검붉게 되어 보기에 좋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방지하는 법으로 철화분(鐵花粉)을 쓰는 법도 전해지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구리쇠는 전통적인 차력약의 중요한 재료였으며 옛날 차력약으로 구리가루를 먹다가 구리에 중독되어 피오줌이나 피똥을 누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하동인, 1992: 167). 그럴 때는 반드시 질경이를 먹여서 해독 하거나 닭 사료에 넣어 법제(法製)해서 사용하였다(최진규, 1997: 74).
가령 구리를 법제하는 과정으로 나도향(2006)은 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복용하는 방법으로 계분동을 소개 하였다. 계분동이란, 사람이 몸에 구리를 흡수하기 위해 구리의 독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닭에게 먹인 다음, 뼈 속에 스며든 구리를 그늘에 말려 다시 사람의 체질에 맞게 생약 처방을 하여 먹는 차력약으로 닭도 3개월 정도 된 토종닭을 골라서 쓴다. 닭들도 법제된 구리를 먹을 능력이 없으므로 인삼을 비롯한 비싼 약제를 닭에게 먹여 기운이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구리 가루(생구리를 펄펄 끓는 유황에 넣어 독을 빼는 과정을 거친다)를 동시에 먹이게 되는데 닭의 변으로 나오는 구리를 또다시 정제하여 먹이고 먹이기를 3개월쯤 하게 되면 드디어 닭의 뼈 속을 스며들어 계분동(鷄糞銅)이라 부르는 차력약이 완성된다 하였다.
기차력(氣借力)은 내공차력으로 불리기도 하며, 관건은 호흡과 호흡을 멈추는 지식(止息)이다(박종관, 1990: 408).
차력과 관련된 여러 호흡법들이 복잡하게 설명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흡기 후 유기하는 과정이 포함되며 이런 지식(止息)과정이 힘을 길러준다. 사람은 고통이 따를 때 숨을 멈추고 참는 경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지식은 강기(剛氣)를 얻을 수 있다(황풍, 2000: 93). 한성(2008: 78)은 인위적으로 숨을 멈추는 지식은 몸의 내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지만 숨을 장시간 인위적으로 멈추는 것은 근원적 생명에너지를 쓰는 것이어서 경계하라고 하고 있다. 즉 이 지식(止息)이 내력을 발생시키는 것이고 오랫동안 수련하게 되면 내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10초 흡기, 10초 유기, 10초 호기를 끊임없이 숫자를 잊지 않고 집중해서 일천회할 수 있다면 차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동양의 수련법들이 모두 심력(心力)을 키우는 고도의 자기최면술로서 목이나 팔뚝피부에 쇠꼬챙이를 끼우고 물이 가득한 양동이를 매달아도 아프지 않고 피가 나지 않는 이유는 강력한 자기최면을 통한 관련신경과 근육의 조절에 있는 것이다. 숨을 단전에 유기하는 자체가 내력을 쓸 수 있는 일종의 축기과정이다. 더불어 호흡과 더불어 응시법, 관념법, 일갈법 등의 과정을 통해 강한 심력을 얻기 위한 과정이 도입되어 있다. 안중선식 색상차력(김용, 1992: 357)은 바로 응시법과 관념법을 통해 명료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과정이자 심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과 관련이 있다.
심력은 기력을 바탕으로 커진다. 경험의 반복에 의해 자신감이 상승하면서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응시법은 한 물체를 오랫동안 응시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 시키는 것이다.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된 이미지를 스스로가 원하는 선명한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이 관념법이다. 일종의 강력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볼 수 있다. 선명한 이미지화된 신념은 심력과 더불어 인체 내에 잠재된 극한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기차력(氣借力)에 있어서 지식(止息)시간의 길이를 대단히 중요시하지만, 생명유지에 가장 근간이 되는 호흡을 무리하게 멈춘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식을 통해 무리하게 강기로만 운기(運氣)하는 것도 몸이 받쳐주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몸을 상하게 한다. 오랜 기간 지식을 통한 강한 타법이 육신에 무리를 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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