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여성의 지위
조선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한국인 부부간에게는 사랑이 없으며 그 이유는 얼굴도 모르는 당사자 간의 부모에 의해 혼인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비참했던 조선여성들의 지위에 대해 부언할 것이 있다.
고려 여성들의 지위는 조선시대의 남존여비사상처럼 그리 낮지 않았다. 몽고에 복속되고 난 후, 원종(元宗, 24대) 15년부터 결혼도감(結婚都監)이란 관청을 신설하고 원나라에 그들의 강요로 공녀(貢女)를 바치기 시작하다가 충숙왕(忠肅王) 때에 이르러 처녀[童女]를 바치라고 독촉하기 시작했으니 사대부(벼슬아치들) 집안에서는 딸을 낳게 되면 감추고 외부에 알리지 않게 되면서부터(梁在淵ㆍ任東權ㆍ張德順ㆍ崔吉城 共編, 1971: 228-229) 여성들의 지위는 불가분 급락하게 되었으며 이름조차 없이 집안에 갇힌 폐쇄된 삶을 살게 되었다.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떼 지어 노래하고 즐기며”, 또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쉽게 헤어져“라는 대목에 차주환(1977)은 ‘우리나라 여성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구절로서 조선조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는 송유(宋儒)의 처녀 숭배사상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처녀성(處女性)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여성은 중문 밖을 나가지 못하는 내외법(內外法)을 강요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면에는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가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고려사》에 “충렬왕(忠烈王) 34년에 충선왕(忠宣王)이 평양공(平陽公) 왕현(王昡)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으나 왕현이 죽으매 이를 들였으며, 즉위함에 미쳐서 순비(順妃)로 책봉하였다.”는 기록이나 또 《고려사절요》에 “1219년(고종 6)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최고 집정자가 된 최우(崔瑀)가 후군진주(後軍陣主) 상장군 대집성(大集成)의 딸을 맞아 계실을 삼았는데, 새로 과부가 된 대씨가 자색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우가 장가들었다.”고 하여 왕실이나 최고위층에서 까지도 아이 딸린 과부와의 혼인이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지용(1980)은 고려시대 여성들의 의식구조가 서긍의 1개월간의 관찰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전통적인 수절사상과 효의식 그리고 사회참여의식이 강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김병인(2010: 60)은 "묘지명을 통해본 고려 여성들의 유형은 정절, 효, 남편내조, 자녀교육 등으로 구분되어지며 이 중 정절의 경우 일반적인 고려시대 여성의 모습과는 다르며 여성들이 불교보다는 유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고 하였다.
조선조로 들어서면서 남녀칠세부동석이니, 부부유별이니, 여필종부니 등의 말들이 여성에게 굴레처럼 작용했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자유분방한 것이다(이숙경, 2010: 19). 조선의 조혼(早婚)문제도 원의 잦은 공녀와 결부되어 있다(김지용, 1980: 81-82; 박경자, 2010: 43). 서양인의 관점에서 조선의 주자학이라는 통치이데올로기가 여성을 과도하게 억압하였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제권(열쇠권)은 여성이 지녔다.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가부장적이라는 겉모습은 남자들의 명분뿐인 것이다.
16세기 전반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유성구 안정 나씨(安定 羅氏) 묘에서 출토된 한글편지는 남편이 아내에게 쓴 정이 담긴 애절한 내용으로 고어 한글로 정성스레 썼고 특히 16세기 사용되던 경어체 ‘~하소’라고 적어 부부가 서로 존칭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원희복, 2012.05.20.).
제임스 게일(1979: 225-226)은 “사실을 말하면 울안에 갇힌 여자는 남편의 요구에 의해서 그처럼 비천해진 것이 아니며, 아무튼 그녀는 남편의 배우자인 동시에 가정 내에서 상위에 있고, 바로 이 조선의 신사(양반)보다도 더 치맛바람에 휘어 잡힌 남자는 보기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여성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역시 여성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원나라에 강제로 바쳐야 하는 공녀가 핵심 역할을 하여 아예 딸이라는 존재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와 더불어 뭇사람들에게 넋이 담긴 이름이 마구 불림으로써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재도 ‘구설수’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런 점에서 특히 여성들의 이름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극도로 금기사항이자 특별히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의 발로인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심지어 왕과 왕세자의 배우자 선발을 위한 공개적인 간택제도까지 반대했다. 김종성(2012.05.04)은 ‘사대부가 간택제도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사대부 아가씨들의 체면이 손상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둘째, 신부 집안의 결혼 주도권을 침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 권12에 따르면, 사대부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이 예법'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신랑이 신부 쪽으로 찾아가는 것이 예법이라고 본 것이다.’ 왕실과 외척이 되는 것에 대하여 당사자인 여성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만큼 여성을 귀하게 여기는 측면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를르 달레는 “여자들은 일정한 친등(親等)의 친척에게가 아니면, 그것도 소정의 예법에 의해서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는다. 가마를 타고 가는 여자들은 대궐문 앞을 지날 때에 내리지 않아도 된다. 이런 관습은 예의 관념에서 요구되는 것 같으나, 분명히 여성에 대한 멸시와 풍기문란에서 오는 다른 관습들도 있다. 가령 여자들은, 어떤 사회계급에 속하든, 어떤 위법행위를 범했던, 자기들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법정에 소환되는 일이 거의 없다. 가령 또, 여자들은 집안 어디고 들어갈 수 있으며, 언제나 심지어 밤중이라도 서울 거리를 돌아다닐 권리가 있는데, 이에 반해 남자들은 종소리가 통행금지를 알리는 아홉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는 절대로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아무도 외출할 수 없고, 위반하면 막대한 벌금을 내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를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더라도 여성의 대한 멸시나 풍기문란에서 오는 다른 관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혼자 여행하기를 즐긴 비숍의 여행기에는 나약한 여성이 혼자 한국을 여행하면서 그 경험을 기록한 기행문이 있는데 개성에서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생각해보면 외국의 연약한 여인이 혼자 커다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골목에 붙어있는 거처에서, 수행원도 없이 영어는 단 한 마디도 모르지만 내 돈이 어디에 있는지는 훤히 알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내 목을 찌르고 돈을 털어 갈 수도 있는 병사와 함께, 대문도 잠기지 않고 자물쇠도 없는 방에서, 아무런 불안감 없이 네 활개를 뻗고 누워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저런 천연덕스런 설명들에는 한국의 민심을 알게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새비지 랜도어(2010: 148-150)는 ‘특히 상류 계층 송사(訟事)가 일어나는 분란이 절반은 여자로 인한 것이며, 아내는 스스로 통치자가 되는 대신에 비록 드러내 놓고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현명하고도 은밀한 방법으로 무기력한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승진, 처벌, 사형들은 대개 여자들이 꾸민 일의 결과이다.’ 또 ‘왕비도 왕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조선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왕이 아니라 왕비이다.’ 또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대해서도 ‘여자들은 자신의 야심과 못된 습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거머리처럼 백성들로부터 더욱 많이 우려내도록 끊임없이 관리들을 부추긴다.’고 실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면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한국인 부부간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표현은 현대의 잣대로 보면 그 말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당시로 볼 때 분명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맺어진 현대 부부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현대에 있어서의 이혼율은 급증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사랑을 찾아 방황한다. 우리 선조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젠가는 넘어서야할 오욕칠정의 대상으로 보았기에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단계를 넘어섬으로써 한때 불타가가 꺼져버리는 것보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숙성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412년 만인 199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고성 이씨 문중의 묘를 이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고성 이씨 15세 이명정(李明貞, 1504 ~1565)의 아내인 일선 문씨(一善 文氏)가 미이라 상태로 발견됐고, 20여 일 후인 4월 24일 그의 손자인 이응태(李應台, 1556∼1586)가 염습 당시 모습 그대로 발굴됐다. 미이라 상태로 발견된 시신도 화제였지만 세상 사람들의 콧날을 시큰하게 한 것은 시신의 가슴 위에 놓인 이응태의 부인이 남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였다. 병석에 누워 있던 남편이 31살의 젊은 나이로 죽으니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 속에 눈물을 머금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남편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아내의 안타깝고 애틋한 사랑은 구구절절 글자마다 배어있고, 작별하는 아쉬운 마음은 편지의 여백까지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또, 무덤 안에는 편지와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삼줄기와 함께 정성껏 짠 미투리, 그리고 남편이 소중히 여겼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배 속의 아이에게 줄 배냇저고리까지 함께 들어 있어 죽은 남편의 넋을 위로하려는 각별했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원이 아버지에게'와 눈물과 함께 짰을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신발)는 450년 전의 한 여인의 죽은 남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어 모두에게 화제를 모았다
먼저 떠난 남편의 관 속에 머리카락을 베어 삼줄기와 같이 엮어 짠 미투리와 사부곡(思夫曲)은 시공을 넘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는데, 현대인의 사랑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지극한 부부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적인 인문지리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2007년 11월호에 남편 병환이 깊어지자 저승 갈 때 신고 가라고 삼 껍질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미투리(짚신)를 삼은 '원이 엄마'의 사연과 미투리를 '사랑의 머리카락(Locks of Love)'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정보시대에 이르러 서구화된 요즘 젊은 세대가 자기 방어적인 경향이 커서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시도조차 하지 않던가, 상처를 최소화 하는 방법으로 연애를 일찍 끝내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쉽게 돌아서는 경향으로 볼 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동서양의 대부분 나라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의 성을 쫓아 쓰게 된다.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평등을 강조하는 시회주의 원리에 따라 법적으로 ‘부부는 각자 자신의 성을 쓸 권리가 있다.’고 명시를 하였다. 밖에서 보기에도 신기했는지 지난 6월 미국 주간지 타임에선 '한국은 법 규정이 없는데도 여성들이 결혼 전 성을 유지하는 관습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혼 후에 학자들이나 저명한 인사들은 이름을 다시 고쳐 쓰기가 곤란해진 것이다. 이혼을 했지만 이전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간 쌓아온 명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성을 고집하는 데에 대해 결론을 유보하고 있는데 내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의 혼인금지 경향이 매우 강하여 타성받이끼리 결혼을 했다는 풍조를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JTBC][팩트체크] 한국은 왜 결혼 후 남편 성을 안 따를까?를 보고 한자 적는다.
조선말 여성들의 지위는 극히 낮았고 그야말로 일속에 파묻혀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노동력 위주의 농본사회라는 사회적 배경은 불가피한 부분이 없지 않다. 별다른 밤 문화가 없었기에 애는 생기는 대로 낳을 수밖에 없었고 육아는 순전히 여성들의 몫이었다.
우리민족의 정령관념에는 그림자에 넋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을 그려도 입체적으로 그리지 않고 평면적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그림자를 그리지 않았다. 그림자를 그리면 넉이 실린다는 소박한 생각을 한 것이다.
우리 옛 선조들에게 있어 그림자[影]는 넋[魂]을 뜻했다. 옛날 법도에 부모나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못하도록 엄한 금기가 돼 내렸음도 바로 그림자가 부모나 스승의 고귀한 넋이기 때문이다.
귀신이 왜 발도 없는 새까만 그림자 모양으로 표현되느냐 하면 바로 귀신은 육체에서 유리되어 허공을 방황하는 넋-곧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옛날 밤길에서 사람 형우를 한 귀신을 만났을 때 그것이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하려거든 그림자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안다고 했다. 귀신이면 그 차체가 그림자이기에 그림자가 생길 터문이 없기 때문이다.
넋은 그 사람, 그 생물, 그 물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은밀히 보호돼야 할 가장 소중한 존재 조건인 것이다.
옛 선조들은 본명을 숨겨두고 호나 자(字)로 불렀고 또 선친들 이름을 댈 때 파자(破字)를 해서 부르거나 위아래 이름 자를 떼어 부르는 이유며, 또 임금님 이름을 기휘(忌諱)하는 것도 그 이름에 혼을 인정하는 애니미즘 때문이요 혼은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비장의 것이기에 본명 기피 습속이 생겨난 것이다. 초목충어 지수화풍(草木蟲魚 地水火風)이 세상에 혼이나 정령(精靈)을 인정하였던 우리 한국인의 억센 애니미즘 사상에서 볼 때 사람의 초상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릴 때 그림자를 그린다는 것은 엄격한 터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기휘 때문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는 아들의 벼슬 때문에 그 아버지가 이름을 바꾼 일이다. 바로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공 류관(柳寬, 1346-1433, 문화류씨 13세)의 일이다.
1426년(세종 8년) 4월 13일,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의정 벼슬에서 나이가 많아 사양하고 물러난 류관(柳觀)의 아들 계문(季聞)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관(觀)은 기휘하여 임금에게 청하여 이름을 관(寬)으로 바꾸었다.“
위의 실록의 이야기는 "임하필기(林下筆記)"(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 편찬)의 제18권 "기휘(忌諱)" 항목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문간공(文簡公) 류관(柳寬)은 처음 이름이 관(觀)이었다. 그 아들 계문(季聞)이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자 관직명이 아버지의 이름을 범한다 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그 아비의 이름의 관(觀)자를 관(寬)자로 고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아비의 이름을 이미 고쳤으니 재촉하여 빨리 부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도 기휘와 관련된 복잡하고 긴박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다.
(1711년) 11월 1일 국서 봉정식과 3일에 열린 쇼군의 연회는 무사히 끝났다.…11일에는 조선의 국서에 대한 쇼군의 답서가 전달됐다. 이를 계기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답서 가운데 조선 중종(재위 1506-44)의 실명인 ‘역(懌)’자가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통신사 일행은 이를 개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막부측은 조선의 국서에 들어 있는 ‘광(光)’ 자가 이에노부의 조부인 에이미쓰[家光] 쇼군의 실명이라며 오히려 개찬을 요구하고 나섰다. 양쪽 간에 팽팽한 대립이 일어났다.…통신사가 당시 조선 임금의 실명을 거론한 문제를 얼마나 중대하게 여겼는지는 《동사일기》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동사일기》 13일 이후의 기록은 온통 국서 개찬 요구 문제에 관한 내용이다.
막부 측의 제안은 ‘역’ 자를 바꾼 일본측 국서와 ‘광’ 자를 바꾼 조선 측 국서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측 국서를 고치기 위해서는 일단 본국에 돌려보내 조정의 논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종’은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묘호(廟號)이고, 실제 이름은 이역(李懌)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반인들조차 죽은 사람의 생전 이름을 부르는 것을 몹시 꺼렸다. 국왕의 실제 이름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통신사 일행은 “신(臣)은 설령 죽더라도 이 국서를 가지고 한걸음도 문 밖에 나설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격렬한 논쟁 끝에, 일본 측 국서를 수정함과 동시에 조선 측 국서도 본국에 돌려보내 수정하여 쓰시마에서 교환하자는 이례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1월 19일 통신사 일행은 에도를 출발했다.
조선에서는 일단 국서를 수정하기로 결정했지만, 세 사신을 비롯한 일부 책임자들은 ‘나라를 욕되게 한 죄’로 처벌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통신사 일행은 2월 25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신사의 정사, 부사, 종사관 및 상통사 등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곧바로 경상도 좌수영에 구속되었다.
이런 인식을 지녔으니 혼인을 한다고 해서 성을 바꾸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령관념은 이전에 정령신앙(animism)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었으며 숭배의 대상이라는 개념에서 ‘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면 절대적인 존재라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인식 영역 밖의 것이었기에 매번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내가 거부한다고 없어지지 않으므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석문도문, 2010: 7).
주강현(1997: 154-155)은 우리의 전통적 신관은 다신교적인 만신을 섬기며 그래서 무당을 만신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신도들이 트랜스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믿는 방언, 신도들의 영혼이 천상에 올라간다고 믿는 입신 따위가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트랜드 형식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미국 하버드대의 종교학자 바비 콕스는 금세기 들어 대부분의 고전종교들이 정체 또는 쇠락의 길을 걸어온 반면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급성장한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가 귀신들림ㆍ귀신쫓기 등 무속종교의 요소를 상당부분 수용함으로써 사람들의 원초적 영성을 끌어내었으며 ‘무교적(巫敎的)기독교‘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다(서화동, 1996.02.18). 현재 약 백만의 가톨릭 신자밖에 없는데도 그 민족 중 백3명의 남자와 여자가 시복을 받은 것이다. 성인들이 수에 있어서 한국은 단숨에 성성의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국보다 성인이 많은 나라는 오직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뿐이다. 한국인은 4위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기록이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백 3명의 순교자들 덕분이다. 오직 순교자와 성인만이 그러한 성스러운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984년 5월에 교황에 의해 시성된 백 3명의 한국 순교자 중 반은 여자이다. 어린이나 여자들이 순교의 시련을 겪는 것은 남자의 경우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성인들 가운데 우리의 어머니가 된 수십 명의 한국 여성들은 최후의 심판 덕분에 우리에게 그러한 기회를 더 많이 주게 될 것이다. 그리 많지도 않고 그처럼 짧은 시간 동안에 사도들에 의해 기독교도가 된 오래 된 나라의 성인의 수를 한국이 능가한 것은 어찌 된 일일까(게오르규, 1984: 57)? 이규태(1988: 122-123)는,
1866년에 처형된 베르뉘주교는 “조선 민중의 성격은 매우 단순하여 사리를 깊이 따지길 싫어한다. 성교(聖敎)의 진리를 가르치면 곧 감동하여 믿음에 들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무릅쓴다. 하지만 진리를 풀이하면 잘못 알아듣는다. 특히 부녀자들과 천인층의 남자들이 그러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순교사에서 복자(福者)의 성렬에 오른 신유ㆍ기해 순교자는 79명 가운데 근 3분의 2가 부녀자였으며 병인교난(丙寅敎難)에 검거된 천주교도의 수는 남자 셋에 여자 하나의 비율이었으나 배교(背敎)하지 않고 순교한 수는 78명으로 남녀 비율이 남자 하나에 여자 둘 꼴의 반대현상을 보이고 있다. 1868년 감옥에 갇힌 한성임이란 여신도는 법정에서 우매한 한국 부녀자들의 값싼 신앙 태도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미련한 여인들은 겨우 한 구절의 성구만을 외고는 바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천당에 갈 줄 믿고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마치 불꽃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들만 같다.”
이규태(1988: 122-123)는 조선의 부녀자들이 그 가혹한 형벌을 이겨 내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게 한 신앙심의 원천을 한국 여성이 대대로 감수해 온 수난의 역사에 있다고 한다.
최중현(1993: 24-25)은 “이것은 이미 언급된바와 같이 기독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샤머니즘의 끈질긴 생명력은 유입된 외래종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국가의 보호 속에서 찬란한 융성의 길을 걸어왔으면서도 어느 종교도 샤머니즘을 제거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외래종교들은 수용과정에서 샤머니즘에 흡수 융합되어 변질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종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샤머니즘의 자체는 변질됨이 없이 오히려 발전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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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종교와 미신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인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에는 영혼숭배자다(Homer B. Hulbert, 1906: 403-404).” 하지만, 그는 기독교가 전해진 이후, 한국인이 기존의 전통들을 소거하지 않은 채 그 위에 기독교를 하나 더 얹어 신앙의 레퍼토리에 추가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기독교인이자, 유교인이자, 불교적 사상가이자, 무교인으로서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의 종교 생활까지는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房家, 2011.09.15).
비교종교학을 공부해보면 흥미진진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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