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라면이야기

수암11 2008. 12. 23. 11:33

내가 근무할 시기에 언제부터 라면이 식단에 정기적으로 나왔는지는 모호하다.

아마 77년 8월 입대이니까 대충 전후로 미루어 짐작되는데, 이렇게 짐작을 하는 것은 라면조리가 단체 배식 시 어려움으로 라면조리법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군의 모든 복리후생이 열악해서 가령 고기류 같은 특별식이 나오면 간부들이 조금씩 덜어내 집에 가져가기도 하곤 했는데, 문제는 그게 과도하다 보니 정량지급이네, 일식삼찬이네 하여 말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라면배식은 정말 말이 많았다. 워낙 활동량이 많다보니 웬만큼 먹어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터에 플라스틱 식기에 담긴 용량이 아무리 봐도 정량인 라면 두 개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였다.

동작이 빠른 사람들은 빨리 해치우고 한 번 더 줄을 서서 배급의 기회를 노리기도 하는데, 물론 그 중에 나도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배식에 사단이 나고 감시가 심해졌는데, 두 번째 배식 받으려다 걸리면 무자비하게 바로 머리나 손등에 뜨거운 라면국물에 달궈진 배식국자가 날아왔다.


문제는 라면의 조리방법에 있었다. 대대병력 분량의 인스턴트식품인 라면을 동시에 끓인다고 생각해 보자. 그게 제대로 끓여졌다 하더라도 배식과정에 푹 불어 버리는데, 제대로 끓인다는 게 실제로 불가능하여 아예 푹 삶겨져 꼬불꼬불한 면발은 없어지고 바로 불어 퍼질 대로 퍼진 국수가 된 상태로 먹게 되는 것이다. 라면도 아니고 퉁퉁 불은 국수가 라면이라고 나오는데다가 실제로 배식이 잘못된 날은 퍼진 국수 몇 가락과 국물만 잔뜩 나오게 되니 불만이 안 생길 리 없는 것이다.

그래서 라면조리법과 배식량에 대해 불만들이 쌓이고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찐 라면이다. 네모나고 평평한 밥 찌는 알루미늄 밥판에다가 라면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시키면서 라면을 찌는데, 집게로 라면 두 개를 식판에 담아주고 국물은 따로 끓여서 그 위에 따로 얹어주게 되었다. 그렇게 조리법을 바꾸고 배식을 하게 되자 정량지급에는 말이 없어졌는데, 문제는 라면을 쪄서 내놓다 보니 영 제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불만들은 또 있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고 자란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싫어할 뿐 아니라 불규칙한 식습관으로 위장이 망가진 경우에 밀가루 음식은 위장 벽을 긁어내는 기능이 있는지 밀가루 음식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러한 단체급식에 있어서의 조리법 그리고 배식량과 관련된 문제점이 있지만, 라면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애용되는 간식이자 식사대용으로서 사랑을 받듯이 당시 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제대로 조리된 라면의 경우이며 군이라는 특수한 공간이다 보니 기회가 흔치 않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라면을 끓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군대만의 독특한 조리법을 소개해 보자


플라스틱 식기에 물을 담고 콘센트에 전선을 꽂고 양끝은 분리하여 젓가락을 연결하여 식기에 담가둔다. 물론 이 끝은 충분히 벌려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데, 특별한 열선이 없는데도 물이 끓는다는 점이 늘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방법의 단점은 스프 등에서 나온 이물질 등이 전기 분해되어 플라스틱 식기 바닥에 검은 때를 코팅시키는 그야말로 전기방식電氣防蝕이 이루어져 아무리 세척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식사당번이어서 소대식기를 닦다보면 몇 개가 그런 것이 있는데 어쨌든 불편함 때문인지 내가 근무할 당시에 그 방법은 사라져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특히 이러한 식기는 내무검열 때 식기세척불량으로 걸려서 단체 얼차려 혹은 식사당번들이 아주 혼나게 된다.


당시에는 얼차려가 아주 심해서 저녁점호 때 시정사항이 있으면 푸샵(푸쉬업)이 백회가 아니라 오백 회, 천회를 시켰다. 매질이 아주 심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가혹한 부분으로 그냥 넘어 가기로 한다. 뭔 잘못을 했는지 장교들도 때로 완전군장한 채로 먹고 자는 시간 만 빼고 연병장을 일주일씩 돌아야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도 좀 거시기 했다.


고참들은 주로 졸병들을 시켜서 페치카에 반합을 이용해서 라면을 끓였는데, 취침 후에 라면냄새가 내무반에 진동을 하면 모두 입안에 군침이 돌아 꼴깍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지금도 그 냄새가 생생하다.


통상 페치카 당번은 중상정도의 고참이 담당하는 게 관례적이었다. 먼지를 덮어쓰고 궂은일이다 보니 페치카 내에 불을 손본다는 빌미로 취침점호를 빠지는 혜택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탄재를 치운다거나 탄을 타온다거나 혹은 탄재와 섞어서 물에 갠다거나 하는 일은 모두 아래 졸병들 몫이었다. 페치카 당번에게도 라면을 끓여먹는 특권이 있었지만, 그것은 혼자 몰래 끓여 먹는 것이어서 가끔씩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페치카 화력이 너무 세서 물은 증발하고 알루미늄 재질의 반합까지 녹여버리는 것이었으니 혹 늦게라도 가면 반합 손잡이인 철사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재물조사가 워낙 엄격해서 부족한 반합을 채워 놓느라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 가운데서도 약간 짬밥을 먹고 군대요령을 조금 깨달은 시절에 이야기이다.

어쨌든 연대장 내무검열인가? 준비를 한다 해서 재래식 화장실을 각 소대에 차출된 또래의 비슷한 동기들이 맡아 하게 되었는데, 물을 떠다가 부산을 떨며 그나마 최대한 깨끗이 물청소를 하는 가운데 라면을 끓여 먹기로 합의를 했다.

라면은 구했는데 아무런 도구가 없었다. 물통으로 쓰던 18리터짜리 쇼트닝 깡통을 그릇삼아 싸리비와 쓰레기 등을 주워 불을 지폈다.

모두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던 귀한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하여 땔감을 주워오고 망을 보고 한 마음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수저가 없으니 한 친구는 화장실을 청소하던 싸리비를 분질러 녹 쓴 면도칼로 대충 그 끝을 깎아서 젓가락을 만들고 또 다른 친구는 라면요리의 전문가라도 되는 양 이것저것 침을 튀겨가며 싸리비로 만든 젓가락으로 쇼트닝 깡통 속의 라면을 휘젓는다.

그야말로 재래식 화장실 청소도구들이 라면조리용 도구로 바뀐 것이다.

당연 그릇이 없으니 라면봉지에다 덜어 먹는데 화장실 옆에서 먹는 라면 맛 또한 기가 막혔다. 밤에 내무반에서 고참들이 먹는 라면냄새에 얼마나 회가 동했으면 지저분한 재래식 화장실청소를 하면서 옆에서 끓여먹었을까?


이런 라면을 원 없이 먹어 본 적이 있다.

당시 근무 시절 군에서도 국가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끊임없이 빡센 훈련에 요령도 좀 피고 싶어서 지원자들이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교육 파견을 신청해서 나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하는 일이란 매일 먹고 자고 하는 시간 이외에는 자율학습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참 혈기 방장한 화랑용사들에게 좀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월급날이면 소위 짤짤이라고 불리는 동전치기를 하기도 했는데, 과도하게 하지 않고 심심풀이로 주머니에 있는 동전만을 가지고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제의로 화투를 치기로 했는데, 당연히 화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시 보급되던 비누포장 마분지곽이 있어서 그걸 자르고 볼펜으로 그려서 조잡한 화투를 일습 만들었다.


30여 년 전 일이라 종목이 뭐였는지도 모르고 모두 아마추어였는데 운이 좋은 사람들이 따는 초보 수준에서 마침 운이 좋았던지 내가 몽땅 땄다. 몽땅 이래봐야 사실 얼마 되지도 않지만, 좀 잃은 사람들에게는 개평을 주고 부대 철조망 너머 붙은 민가에 가서 라면은 시켜 먹기 시작했는데, 물을 넉넉히 붓고 삶아 달라고 해서 국물이 가득한 마치 중국집의 짬뽕곱빼기 분량의 라면을 하나씩 나누어 여섯 개를 국물 남김없이 다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라면 한 양동이를 시켜 들고 오는데 내가 먹은 국물까지 포함된 그 양이 바로 한 양동이 분량이었다.

가져온 라면은 교육생들에게 먹으라고 나눠 주었다.

그 한 양동이의 라면을 먹고 나니 비로소 라면에 대한 오랜 갈증이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