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을 움직여야 한다.
수련을 하는 학인(學人)이나 도인(道人)들이 때로 오랫동안 진전이 없이 벽에 가로 막힌 듯 지지부진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움치고 뛸 여지가 없을 때 참으로 난감하다.
수련을 모르고 사는 시절이야 고민이 되지 않겠지만 이미 수련에 깊숙이 발을 담근 이상 이러한 상황은 매우 견디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대개 정신적 명현상황일수도 있다. 정신적 명현은 때로 육체적 명현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그 고통은 수심(修心)공부가 그러하듯 자신이 감내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 오기 때문에 방심하면 한 순간에 폐인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여왔던 수련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마음이 앞서서 심마에 휘둘려 삿된 길로 빠져 정상적인 삶을 상실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흔히 이런 경우에 유일한 돌파구인 양 자신의 정성이 부족함을 탓하여 하늘에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기도는 염원을 담아 간구하는 것으로 그만큼 절박함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학인이자 도인이라면 기도를 통해 상황을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늘을 움직이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작은 정성을 모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을 내 거는 것을 아주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인데 하늘을 움직이기 위해 생명을 내거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은 자신에게나 소중한 것이지 하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하늘이 준 생명을 담보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다는 '낙수천석(落水穿石)‘의 원리는 하찮은 물방울이 불가능한 결과를 이끌어내어 돌에 구멍을 낸다.
진리는 주변의 사소한 것에 있듯이
정말로 정성을 드려야 할 것은 사소한 것들이다.
석문호흡에서 단순히 호흡을 통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점을 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 주변의 극히 작은 것을 움직이다 보면 하늘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고만고만하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평범한 삶을 살거나 혹은 세계적인 지도자가 변모할 때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작은 습관들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단계이건 수련이 지지부진하다고 생각될 때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도 행보가 막힌 한궁, 현궁, 청명, 화백, 북천, 현광, 목원과 여러 도반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