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비밀
때가 이르러서인가?
창조주의 비밀들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글을 봐도 대부분은 무심코 보게 되는데...
도반의 배려로 전혀 생각지 않았던 《왓칭》을 읽게 된다.
몇 장 읽지 않아서 충격을 받는다.
인간창조의 핵심비밀이 이렇게 쉽게 세상에 나올 즈음이 되었는지?
그동안 인문학처럼 제시되던 비밀이 이제는 자연과학서의 형식을 갖추고 조목조목 현대물리학 혹은 과학자의 이름을 빌어 과거 요소환원주의자들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 아주 쉽고도 납득할만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의 요체는 집중이다. 하지만 이 집중은 생각대로 쉽지 않다. 집중하려고 할수록 집중하고자 하는 집착이 오히려 집중에 저해요소가 된다.
흔히 젊은 남녀의 관계에 대해 ’쫓으면 멀어지고 물러서면 다가온다‘는 미묘한 표현처럼 수련에 있어서 집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집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집중을 저해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당선생님은 양신(陽神)수련에서 “빛이나 여의주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저 자연의 경관을 관조하듯 의미 없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 각각의 현상에 집착하거나 의식을 두게 되면 도심(道心)이 흩어져 빛과 여의주가 보이지 않게 된다.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보는 가운데 보이게 되는 이치를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여기에서 그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어 길을 잃어버리면 더욱 집착에 빠져 아예 보이지 않게 된다. 절대로 의식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 선조들은 고도의 집중을 위해 ’의식분할(意識分割)‘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집중을 위해서 집중을 버리는 의식분할이라는 방법을 통해 집중에 다가가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 하여 마음이 앞서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마음을 한 곳에 쏟아 부음으로써 생겨나는 집착을 항시 경계했다.
불가(佛家)나 수련과 관련해서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말 가운데 방하착(放下着)이 있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의 방하착은 말이 쉽지 내려놓으려는 마음조차도 집착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비운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내려놓는다‘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쓰기까지 했다.
방하착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치 티끌조차 남아 있어서는 이루려는 욕심 때문에 한순간에 불가에서 말하는 심마(心魔)나 마장(魔障)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이 심마나 마장들로 인해 관문을 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서 이를 경구로 삼으라는 의미의 표현이나 화두가 생각 외로 많다. 김구선생의 나이 20세(1895) 때 유학자 후조(後凋) 고능선(高能善) 선생을 만나 과단성을 키우라는 의미에서 내려준 교훈으로 “가지 잡고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得樹攀技無足奇 懸崖撤手丈夫兒)”는 표현이나 《임제록臨濟錄》에 “그대들이 참다운[如法] 견해를 얻고자 할진대 오직 단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함을 입지 않아야 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어떠한 경계(境界)에서도 투탈자재(透脫自在)하여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을 꿰뚫어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된다.”는 표현(흔히 살불살조殺佛殺祖)로 표현됨)이 시사하듯 진정한 방하착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는 자세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마(魔)가 깃들기 쉬운 집중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학인(學人)들이 나름대로 수련의 첩경(捷徑)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와ㆍ좌식들이여!!!
이제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왔다!!!
부디 관찰자의 심안으로 그대 수련을 멀거니 바라보라~
인연이 있는 수련인이라면 그 어느 단계이든 기대 이상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