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복습을 하며-한당 선생님에 대한 추억1..
05.04.09 08:02
이 글들은 멕시코 남단의 중앙아프리카에 소재하는 벨리즈공화국에서 서부에 위치하는 마운틴 파인리쥐라는 정글에서 쓴 기록들입니다. 다시 시작하기 번거로워 관련 부분만 조금 보완합니다.
마운틴 파인리쥐에 영화 ‘대부’를 감독한 분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있다는 군요.
언젠가 말씀드린 5자매 폭포 가는 초입에 있답니다.
당시 5자매 폭포를 가면서, 메인도로에서 우회전하자 얼마 후에 웬 집이 있는가? 했는데 바로 거기인 모양입니다.
다녀온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참 외지고 비포장인데도 불구하고, 시설도 괜찮은데다가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맛도 근사해서 생각보다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는군요.
기회가 된다면 방문해 보고 싶군요.
얼마 전 뒷집 말씀드렸지요? 한 3~40m 떨어져 있는 가장 가까운 집인데, 댐에서 시작되는 송전공사 하는 분의 책임자가 머무는 숙소, 그 집에는 도대체 몇 명의 아이들이 있는지 구분이 안 됩니다. 백인 부부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데, 대여섯 살 되는 아이들이 사륜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곧잘 돌아다닙니다. 그도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싣고서...
처음에는 4명인가 했는데, 어느 날은 6명, 오늘은 보니 처음 보는 제일 큰 누나인 듯한데, 8~9살 되는 어린애가 굉음을 내면 오토바이에 동생들을 태우고 동네를 누비고 있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부터 큰 애까지 7명 같은데, 쌍둥이처럼 보이는 애들도 있지만, 그 터울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벨리즈에서의 수련환경은 비교적 열악하지만, 미미한 가운데 조금씩 적응되어 가고 있습니다. 때로 짬을 내어 평소보다 조금 여유 있게 수련한 날 저녁에는 온양 복습을 합니다.
여기 오기 전, 환송회라 해서 일주일 이상을 줄 창 마신데다가, 와서도 한참 마셨던 술의 영향에다, 당장에는 쓸모없는 여러 스트레스 탓인지, 십이경락 중, 마지막 좌측 간경에서 조금 지체되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완화 시키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참! 좌측 간경을 하면서 작은 심득을 하나 얻었습니다.
본능에 근저한 오욕칠정은 다스리기 어려워 제어한 듯싶으면 쌓여있고, 터트리면 더 소모적이 되는 바 참으로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분노는 다스리기 더욱 어려워 잠잠해진 듯 하다가도 기회만 오면 불쑥불쑥 삐져나와 당혹케하는 인성 중에 하나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집요하고도 끈질긴 집착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감정을 기운으로 치자면, 하나의 강기에 대비될 수 있는데, 뚫기 어려운 경락 구간에 대해 이 기운을 빌어 운기를 하는 거지요.
이런 방법을 쓰다보면, 자연스레 불필요한 감정들이 해소되기도 하고, 수련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사랑에 빠진 남녀들이 그 사랑의 감정을 끌어 수련을 시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궁금합니다.^^;
온양복습을 하노라면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한당선생님과 같이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산문사님과 소도회 분들 그리고 두 분이 더 배석했습니다.
저는 처음 선생님을 가까이 한 자리여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조심스레 식사를 할 정도였고, 다른 분들도 말씀이 없어서, 따로 마련된 중국집 방안은 한참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웬만한 장소에서도 분위기를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해온 저로서도 말문을 트기에 고심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얼어붙은 분위기를 선생님께서도 고심하신 듯 합니다만, 먼저 선생님께서 분위기에는 조금 맞지 않았지만(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깨뜨리시며 하신 말씀이 거짓말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도문에서 금기사항이야 거의 없지만, 그나마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조항이지요.
당시 저는 건설업계통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한국 사회의 부정부패된 단면을 거리낌 없이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목적을 위해 ‘정‘이라는 빌미를 씌워서 뇌물을 주는 일은 다반사이고, 술자리향응 등에 고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기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에 쓴 수련일지에도 있었지만, 퇴근시간과 수련시간이 맞지 않아서, 붐비는 테헤란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버스전용차로를 늘 이용하였고,
좌회전 차선이 밀리면, 편도 4차선 바깥에 차선을 하나 더 만들어 좌회전하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무리한 끼어들기를 제외하고도, 차선위반 신호위반 등, 대여섯 번의 불법운전을 일삼았지요.
말이 옆으로 새나갑니다만, 이때 선악의 기준에 대해 화두를 잡고 있었고, 그 기준은 명분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한계에 와 있었지요.
어느 날 단동 도담실에서 제 의문에 대해, 지금 문주님이신 당시 경사님께 명분과 아울러 주변과의 조화라는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중국 음식점의 그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의 요지가 하도 귀한 말씀이어서 귀가 후에 바로 제 식으로 기록해 두었고 언젠가 올린 “한당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때로 용납이 되는 거짓말”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저녁식사 모임에 모두 제시간에 일찍 모였지만, 한당선생님은 다른 볼 일로 인하여 한참 늦으셨습니다.
당시 단동에서 사용하고 있던 ‘양송‘이라는 닉네임을 본따 만든 ’양송문’이 있었고 식구들이 한 삼십 여명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도화제 안에 가족이었지요. 그 가족들은 전국 도장에 걸쳐 있었으며 모두 일대 일로 맺어졌기 때문에 가족 간에도 서로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어쩌다가 모일라치면 제가 서로 간에 가족임을 확인시켜 주곤 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해체되었지만, 저조차 아직까지 얼굴도 모르는 아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지요. 설혹 가족 간이라 하더라도 보편적인 형태의 가족이 아니라 도반으로서 남녀노소를 떠나 좀 더 친밀한 유대관계를 지니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다만 호칭을 가족처럼 불렀을 뿐이지 수평구조를 지니는 가족관계였습니다. 저보다 훨씬 먼저 입회를 하고 수련단계와 내공이 높은 고수분들도 단동에서 만큼은 이상한 족보로 꼬이는 것이었습니다. 한 7, 8년 터울 지는 부녀관계가 성립되곤 했었으니 그럴 만도 했었지요.
한당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거산문사님께서 지나가는 말투로 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우려하고 계신다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재미삼아 만든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외견상 우려스러웠던 부분은 워낙 빠른 속도로 가족이 늘어가면서 항간의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윗분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니 도리가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 한 마디로 양송문은 해체되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선생님께서는 그런 썰렁한 식사 분위기 때문에 낯선 자리에서의 식사를 자제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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