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남녀는 표현하는 언어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다소 감성적이라면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이성적이라 할 수 있다. 옷차림도 여성들이 자신을 위해 꾸미는 경향이 있다면 남성들은 외적으로 비춰지는 타인을 의식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이러한 경향은 줄어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대중매체의 발달로 대중적⋅다중적 소통의 시대의 도래로 인해 소통이 훨씬 더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성적 소통은 소정의 수순을 밟아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즉각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세계화 된 현대에 걸맞은 소통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전 분당지원에 다녔던 연로하신 분이 다담자리에서 현대 젊은 여성들의 짧은 옷차림에 대해 개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은연중에 다소 두둔하는 이야기를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을 하셨다. 사실 그분 생각이 고루하다 하겠지만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오랫동안 젖어있어서 잘잘못을 떠나 그 시각을 바꾸기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우스갯소리가 있다. 많은 남성들이 근무하는 직장에 한 명의 여성이 근무를 하는데 옷차림이 극히 수수했다. 그런데 옷차림이 세련된 새로운 여직원 둘이 입사를 했다. 그때부터 기존의 여직원이 옷차림이 확 바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그 옷차림이 자신을 위해 행해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었다. 사실 남자들은 이런 해석을 보고도 무슨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렇듯 남녀의 표현은 서로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으로 해서 소통의 걸림돌이기도 했다.
비참했던 조선여성들의 지위에 대해 부언할 것이 있다.
고려 여성들의 지위는 조선시대의 남존여비사상처럼 그리 낮지 않았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떼 지어 노래하고 즐기며”, 또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쉽게 헤어져“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몽고에 복속되고 난 후, 원나라에 그들의 강요로 공녀(貢女)를 바치기 시작하다가 충숙왕 때에 이르러 처녀[童女]를 바치라고 독촉하기 시작했으니 사대부 집안에서는 딸을 낳게 되면 감추고 외부에 알리지 않게 되면서부터 여성들의 지위는 불가분 급락하게 되었으며 이름조차 없이 집안에 갇힌 폐쇄된 삶을 살게 되었다. 조선의 조혼(早婚)문제도 원의 잦은 공녀와 결부되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조선의 주자학이라는 통치이데올로기가 여성을 과도하게 억압하였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제권(열쇠권)은 여성이 지녔다.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가부장적이라는 겉모습은 남자들의 명분뿐인 것이다. 이나미(2012)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남자의 숫자가 줄어들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예학에 치우치다 보니 극단적인 남아 선호 사상이 자리 잡았을 수 있다.”고 하였다. 노동력이 절대 가치를 지니는 농본주의 사회도 응당 한몫했으리라는 생각이다.
16세기 전반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유성구 안정 나씨(安定 羅氏) 묘에서 출토된 한글편지는 남편이 아내에게 쓴 정이 담긴 애절한 내용으로 고어 한글로 정성스레 썼고 특히 16세기 사용되던 경어체 ‘~하소’라고 적어 부부가 서로 존칭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원희복, 2012).
제임스 게일(1979)은 “사실을 말하면 울안에 갇힌 여자는 남편의 요구에 의해서 그처럼 비천해진 것이 아니며, 아무튼 그녀는 남편의 배우자인 동시에 가정 내에서 상위에 있고, 바로 이 조선의 신사(양반)보다도 더 치맛바람에 휘어 잡힌 남자는 보기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여성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역시 여성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심지어 왕과 왕세자의 배우자 선발을 위한 공개적인 간택제도까지 반대했다. 사대부가 간택제도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사대부 아가씨들의 체면이 손상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둘째, 신부 집안의 결혼 주도권을 침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 권12에 따르면, 사대부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이 예법'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신랑이 신부 쪽으로 찾아가는 것이 예법이라고 본 것이다. 왕실과 외척이 되는 것에 대하여 당사자인 여성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만큼 여성을 귀하게 여기는 측면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를르 달레는 “여자들은 일정한 친등(親等)의 친척에게가 아니면, 그것도 소정의 예법에 의해서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는다. 가마를 타고 가는 여자들은 대궐문 앞을 지날 때에 내리지 않아도 된다. 여자들은, 어떤 사회계급에 속하든, 어떤 위법행위를 범했던, 자기들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법정에 소환되는 일이 거의 없다. 가령 또, 여자들은 집안 어디고 들어갈 수 있으며, 언제나 심지어 밤중이라도 서울 거리를 돌아다닐 권리가 있는데, 이에 반해 남자들은 종소리가 통행금지를 알리는 아홉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는 절대로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아무도 외출할 수 없고, 위반하면 막대한 벌금을 내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를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더라도 여성의 대한 멸시나 풍기문란에서 오는 다른 관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새비지 랜도어(2010)는 ‘특히 상류 계층 송사(訟事)가 일어나는 분란이 절반은 여자로 인한 것이며,…또 ‘왕비도 왕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조선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왕이 아니라 왕비이다.’ 또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대해서도 여자들의 야심과 못된 습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관리들을 부추기는데서 생기는 것으로 실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면을 기록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조의 뛰어난 대학자이지만 ‘17세기 여성사의 문제적 인물’로 묘사되는 부분이 없지 않은데 바로 ‘’ 안의 내용은 국내 박사과정의 논문제목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 는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계녀서(戒女書) 남편 섬기는 도리에서 “여자가 부군을 섬기는 일 가운데 투기를 아니 하는 것이 으뜸가는 행실이니 일백의 첩을 두어도 본체만체 말하지 말고, 첩을 아무리 사랑하여도 성낸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더욱 공경하여라.” 하였다. 사실 전후의 내용으로 볼 때 ‘고금 천하에 투기로 망한 집이 많으니 투기를 하면 백가지 아름다운 행실이 모두 보람 없이 되니 깊이 경계하라.’는 의미이지만 호사가들은 모두 젖혀두고 단지 남성이 백 명의 첩을 두어도 투기를 하지 말라는 남성우월주의의 조선시대 남성상만 부각하려하는 현대적 잣대 때문이다.
뜬금없이 송시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바로 가까운 우리 주변에 그 삶을 살았던 당사자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거두절미하고 위 내용 일부만을 들었을 때에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슬하에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을 두었고 후사를 잇기 위해 숙부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인 점을 보았을 때 내외금슬 뿐 아니라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350여년을 건너 전해짐을 느낀다.
현세에서도 그의 성품은 그리 변하지 않아 당시의 면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야외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한 부러움과 소통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에 몇 자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