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관련

세월 속에 풀어내다.

수암11 2015. 9. 30. 19:40

 

세월 속에 풀어내다.


‘비국소성의 의미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확대해석한다면 이기적이거나 배타적인 사고의 결과는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인과율과 관련이 있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성립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Wheeler는 이 실험을 “지연 선택 실험”이라고 불렀는데 실험결과 빛이 과거의 영향을 받으며 실험자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빛이 미래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추출해서 단적인 표현을 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부터인지 여러 생을 살아오면서 나 스스로 특정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 그 키를 잡고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다만 죽음이라는 단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 이어가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분명한 길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확연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려할 필요는 없다.


영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명료하지는 않지만 이어간다는 표현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진화론으로 알려진 다윈은 자연 속에 발전을 향한 본질적인 추동력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 오직 개체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만 작동하듯이, 모든 육체적⋅정신적 특성들은 완벽함을 향해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생물학자들은 맨 아래쪽에 미생물이, 그리고 맨 꼭대기에 인간이 있는 ‘진보의 사다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저명한 사상가들조차 이 진보적인 철학을 열렬히 수용하여 ‘자연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생성하는 고유한 능력’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지구의 생물권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로서의 우주로 시야를 확장하여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다윈에 따르면 생명의 발전이란 마치 나뭇가지가 큰 가지에서 작은 가지로 갈라져 나가듯,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지극히 우연적인 현상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역사 발전의 방향성, 즉 총론 차원의 단선론적 발달관은 그 이론보다 발전의 목적 상실이 더 큰 위협적이었다. 인류에게 있어 그렇지 않아도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은 존재가치에 있어서 그나마 종속 자체의 목적이나 명분을 상실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이론은 초기부터 반발에 부딪쳤다.


김정운(2011)은 인간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고 ‘창조’는 오직 신만 할 수 있으며 인간은 흉내를 낼 따름이다. 그래서 ‘창조적’, ‘창의성’이라는 표현이 옳다고 하였다. 그는 에디톨로지(편집학)라는 신조어를 설명하면서 집단적 정서통제가 문명화 과정이고 개인적 정서통제가 사회화 과정이라고 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왜 그런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답을 해줄 수 없다. 마냥 미지의 영역을 신의 의지로 미루기에 인간은 이미 충분히 여러 생에 걸친 삶을 살아왔다.


그야말로 인간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본다고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선택적 지각'이라고 말한다. 이제 선택적 지각에서 벗어나 포괄적 지각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세월 속에 풀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숙성의 과정이기도 하고 소통의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나라 민족성은 공동체 문화의 소산인 ‘빨리빨리’ 습성이 몸에 배여 있었다. 노동이란 육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협동을 통해 몸은 고달프지만 빨리빨리 처리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습관이 몸에 베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반면에 오래 묵힐수록 깊은 맛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급히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 오류가 쌓이면서 혹은 불가분 음식을 오래 보관해야하는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자연을 사랑한다.


이런 이유를 지리적 배경에서 찾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한국의 시가는 서정적이지 서사시(敍事詩)는 없다. 우선 언어부터가 그와 같은 표현형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의 시가는 자연음을 위주로 한 것이어서 순수하고 단조롭다. 모두가 정열적이고 감성적이며 또한 정서적이다. 2011년 8월 24일 MBC에서 방영된 어느 프로그램에서 유흥준 교수는 선암사로 동행한 미국의 캐서린 할브라이시 여류 평론가가 보성강 풍경에서 감탄한 사실을 언급한다. 세계의 수많은 풍경에서 개별적으로 있는 자연은 흔히 봐왔지만 이렇게 산과 들과 강과 마을이 조화를 이루어 한 컷에 들어오는 광경은 여기 와서 처음 본다며 놀라워하며 한국의 자연은 다른 나라의 자연과 다르다고 감탄했는데, 이것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풍수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관광공사이었던 이참은 세계 어느 나라든 국가(國歌)의 구절에는 추상적인 내용, 즉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우리 애국가에는 산, 강, 나무, 하늘 등 순수하게 자연만 들어 있다고 하였다. 우리민족의 자연관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단면이라 하겠다.


자연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항상 쉼 없이 변하며 어느 샌가 너무 빨라서 ‘유수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여러 대에 걸친 삶은 ‘세월 속에 녹여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삶 자체의 무게가 가볍지 않아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고 이생에 그 모든 마무리를 짓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이기심의 발로인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나’라는 존재만을 의식한 세상이라는 점과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세월 속에 풀어내지 못하고 조급증에서 오는 강박관념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세월 속에 풀어낸 숙성된 맛은 멋이기도 하다. 발효음식이 지니는 독특한 특성과 깊은 맛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만약에 여러 생에 걸친 삶을 의식할 수 있다면 좀 더 다른 삶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련을 통해 내공을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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