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에 대한 단상
선악에 대한 단상
선악의 개념도 좀 더 포괄적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공부를 위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하고 헤어지거나 연인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대부분의 일들은 도의상 혹은 관례적으로 배신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대부분 단정지어 왔고 통례적으로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런데 만약 공부를 위해 그런 상황을 서로 미리 약속을 하고 지상에 내려오기 전에 안배해서 발생시켰다면 과연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사람도 응당 지탄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을 알 길이 없다는데 있으며 만약에 그런 사실이 있다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는 헌신적인 자세에 오히려 감사해야만 하는 것이 통례적 규범이다. 배신을 당한 당사자는 힘들고 고통스럽지 만 그 과정에서 영혼의 성장 혹은 진화를 얻는 이도 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만 이를 시사하는 표현들이 없지 않다. “전화위복”, “새옹지마”, “천우신조”, “구사일생”, “음지가 양지된다.“ 이외에도 유사한 표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흔히 이러한 상황을 우연으로 치부하지만 분명히 우연만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선악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부분이 분명 포함된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런 모든 부분을 모두 감안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실제 존재한다면 판단에 있어서 보다 신중함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는 규범이라는 기준이 필요한 것만은 틀림없다.
조금 다른 예이긴 하지만 이와 유사한 맥락을 지닌 이야기가 있다. 특별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인데 나는 그 제자 분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명백한 잘못이 없는데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심한 나무람을 들었다. 그간 다른 제자들보다 엄격히 대해 왔다는 어느 정도 피해의식도 쌓여 있는 터이라 제자는 쌓인 서운한 감정을 폭발시켰다.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 알고 계신 것이고 그간의 누적된 서운한 감정을 봇물 터지듯 터뜨렸다. 그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이것은 스승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러고는 이제 스승에게서 위로의 답을 기다렸다. 스승은 화난 제자가 속사포처럼 퍼부어 대는 묵묵히 들은 후에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너의 본영(本靈)이 내게 너의 이러저러한 단점이 고치기 어려우니 이런 식으로 반전의 기회를 마련해 주십사 하여 그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다.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마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자는 기상천외한 스승의 답변에 충격을 받았고 그간의 쌓였던 모든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자신의 좁은 속이 그대로 드러난 터이라 오히려 부끄럽기 까지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나 자신도 충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나는 이후에 터무니없는 상황이 벌어져도 가급적 성급하게 단정 짓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다시금 그 행간을 읽는 습성이 몸에 배였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논리를 뛰어넘는 수많은 일들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 인간 사회에는 이런 일들이 알게 모르게 비일비재하다고 할 수 있다.
선조는 붕당정치를 조장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그 후유증으로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그런 왜곡된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입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명분과 국민을 앞에 내세우면서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다. 잘못된 균형의 추동력이 어떤 상보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긴 안목으로 본다면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새로운 계기로 나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로도 자위할 수도 있다.
역사를 알수록 우리에게 일본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인간의 탈을 쓰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다른 행태에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와는 음양 관계라는 표현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아니하였을 뿐더러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전쟁에서 패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건설하였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하였다. 실제 동아시아 국제 전쟁이었던 백강전투(663년,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로 알려짐, 현재의 금강 부근)에서 일본은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661년에 170여척의 전함과 1만여 명의 군대를 파병했다. 2차 파병은 662년 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2만 7천명, 3차 파병은 663년 1만 여명 등 이외에도 일본은 백제부흥운동을 위해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백강 전투에서는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척의 함선 가운데 4백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백제로 피신한 그들의 핏속에는 한반도의 수복에 대한 추동력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혹여 일본은 우리의 감춰진 어두운 단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