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관련

무의식 수련과 심법

수암11 2016. 7. 31. 09:42

무의식 수련과 심법

 

행공이나 회건술을 무심코 풀어나가다 보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부분을 접하고 경외심마저 느낀다. 그럴 때에는 논리적으로 풀어야 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고 인간의 창조원리가 배태된 동작을 통해 인간 이상의 존재에 대한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봉인의 변죽을 건드리는 것은 선배제현들의 시도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언급하고자 하는 심법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고전역학의 입장에서는 입자는 실체이고 파동은 운동현상이다. 입자와 파동은 개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데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모든 입자가 파동의 성질도 보이고 입자의 성질도 보인다.

이스라엘의 와이즈먼 과학원이 1998년에 실시한 이중슬릿실험에서 이중슬릿을 통과한 미립자는 관찰자가 입자라고 생각을 하면 입자의 특성을 보여주고 파동이라고 생각을 하면 파동의 형태로 나타나 양립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생겨난 이 현상을 양자물리학자들은 관찰자 효과로 불렀다.

 

양자물리의 기초를 만든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1927년에 양자역학의 해석을 위해 이중성의 양립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상보성이라고 불렀다. 뒤에 이 원리는 물리현상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현상과 사회현상 등에까지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혜이며 조직의 원리까지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신체 제어에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상호 대립적으로 작용하지만, 또한 둘이 다 있어야만 완전해지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이 상보성을 임종화(1994)는 인문학적 논의에 차용하여 윤리의 상대성절대성 문제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시도한 바 있으며, 박영도(2001: 154)조선 성리학에 있어서 주요 쟁점인 이기(理氣)론 가운데 성리학에서는 이기(理氣) 관계로 서술되며, 이 때 그 관계는 주지하듯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서로 섞이지 않는 관계로(不相離, 不相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의 관계로(一而二, 二而一) 규정된다고 하였다.

 

이 두 관점은 겉으로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논리적인 모순이 아니고, 상보적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입자-파동의 상보성이다. 닐스 보어 상보성 원리는 동양의 태극과 관련이 있다. 동양에 있어서 음양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음양의 조화야 말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원동력이어서 음양조화(陰陽調和)니 음양상합(陰陽相合)이니 하는 표현이 존재하는 것이다.

 

관찰자 효과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결과가 심리학계에서 보고되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의식이 어떤 부분을 본다고 하는 선택작용이 없으면 관찰자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으로 관찰하였을 때는 관찰자 효과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의식적으로 관찰하면 관찰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방건웅(2004: 156)저 바깥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있으나 주관적인 의식이 작용하는 한 관찰자 효과 때문에 그 실상을 제대로 인지할 길이 없다.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무심하게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하였는데, 어디서 들어본 소리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석문호흡 수련 가운데 심법이 있다 심법은 세 번 마음속에 각인시키고 수련 내내 잊는다.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목적하는 바를 심법 하나로 끝내고 오직 단전이나 자신이 원하는 단계의 수련만 이어가는 것이다. 바로 심법을 통해 수련 의지를 보이지만 심법에 매달리지 않고 의수단전을 하는 그것은 어찌 보면 바로 무심한 상태라 할 수 있다. 특히 대맥이나 소주천을 포함하는 몇 단계의 운기과정은 심법이후에 무의식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법의 역할을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면 수련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수련의 목적상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않는다면 진실로 깊은 몰입에 들어가기 어렵다.

 

귀일법 끝물 수련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수련을 하고 있는데, 나 자신이 검은 우주 공간의 녹아 사라지고 심법만 남아 검은 우주 공간에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몰입 상태였지만 특별한 경험이었고 심법을 세 번 외우고 수련 내내 의식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심법은 생명력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수련을 하면서 깜빡 하게 되면 다시 심법을 걸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특히 잠시 졸았던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이럴 경우에 그냥 수련을 할 건지. 아니면 심법을 다시 걸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반복하다 보면 마치 주문수련처럼 끊임없이 심법을 반복하기도 한다. 물론 깊이 잠에 취했다가 깨어났을 경우에는 심법을 다시 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웬만한 경우에는 심법이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무의식 수련에서 마치 주문수련처럼 반복적인 심법을 거는 행위는 심법의 역할을 너무 도외시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심력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