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관련

도골짱 마골짱

수암11 2016. 7. 31. 09:37

도골짱 마골짱

 

수련을 파하고 중독성 있는 칼국수를 먹으로 도장 건너편 음식점으로 갔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어 모처럼 만에 이름을 불러보았다.

창해그는 예전 본원에서 나와 같이 수련을 했었고 다시 분당지원(정든지원)에서 만나 수련을 전신주천까지 했었는데, 직장이 역삼동의 영동전화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도화재와 인연이 다하고 말았다. 그는 특히 불교수련에 대해 관심이 많았었는데, 그를 보면 그가 내게 해준 능엄경의 삼칠대정이 생각난다. 대약을 만들 때 삼칠은 21일 동안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고 정좌상태에서 몰입을 하는 어마무시한 수련법이다. 물론 수련에 있어서는 폼이 매우 중요하므로 엄청난 수련법 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진기수련인 우리 수련은 한 타임 정도 하고 나면 몸이 감당 안 될 정도여서 쉬었다가 다시 해야 할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 수련법이다. 사람들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수련에 있어 능사처럼 생각을 하는데 오히려 우리 수련은 오래 앉아 있게 되면 효율이 떨어져 있지 않은지 되짚어 봐야 한다.

어쨌든 칼국수를 먹으며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참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도화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서점 신간에 낯익은 사람들의 출판물 등 그간 잊고 지냈던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 가운데 결국 주 내용은 수련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불교수련에 빠져 있었고, 장차는 미래라빠를 교조로 하는 티벳수련을 할 요량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오체투지로 십일만 배를 두 번이나 행해야 하는 어려운 수련이었다.

나는 왜 그 수련을 하려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왜냐하면 도화재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나 수련을 하다 떠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수심(修心)공부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은 거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당히 높은 단계에 있다가 나간 이들도 자신의 좁은 틀 안에 갇혀 혼자 수읽기를 하는 경우가 허다한 때문이다. 그가 하고 있는 마음공부도 사실은 우리 수련을 깊이 있게 살펴보지 않아서 간과한 것임을 조목조목 예를 들어 설명을 해주었다.

 

도골짱 마골짱은 도고일장 마고일장(道高一丈 魔高一丈-도가 한 장 높으면 마도 한 장 높다)을 줄여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도에는 항상 마가 따라서 도가 높으면 마가 성한 것(도고마성)은 결국 도와 마가 둘이 아니며(도마불이) 현대물리학에서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둘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서로 보완관계에 있음)를 빌어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수심공부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해서 도고일척 마고삼장이라는 극단적이 표현도 없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가 수련을 시작함에 있어 가장 먼저 부닥뜨리는 것이 가족관계나 혹은 주변의 번잡한 일로 인해 수련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것이 최초로 부딪히는 마(-불교에서 마장)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온몸을 통해 수련을 하는 온양이나 귀일법, 채약단계에서 거쳐야 하는 수심(修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해서 수련에 매진 않고서 그 과정을 넘는데 참으로 어려움이 많다. 물론 수련으로 그 단계를 넘었다 해서 그 과정이 생략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또 거쳐야 할 숙제로 남는 것이다 물론 우리 수련을 하지 않아도 이 수심공부는 평생을 두고 조금씩 부닥뜨리게 마련이다. 자신이 감내할 수준의 심고(心苦)10이라 가정하고 10.5 단계는 도저히 수용이 불가능한 자살이라는 극단의 단계라면 심고는 10.210.3이 와서 감당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살하기도 애매한 심고가 오는데, 자신의 약점 가족, 건강을 포함 가리지 않고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은 그 어느 것도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는 단계를 강요받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 오면 이제 공부할 때가 된 것이며 마를 두려워하기보다 수련이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수심공부는 이제 수심공부를 해야지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공부도 아니며 무조건 수용해서 내려놓으면서 수련으로 조금씩 극복하는 것이 상책이며 또 우리 수련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수많은 마음공부가 존재하는데, 우리 수련의 장점은 부닥치면서 또 깨지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대은(大隱)은 저자에 숨고, 소은(小隱)은 산에 숨는다(大隱隱於市 小隱隱於山 대은은어시 소은은어산)’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창해는 모처럼의 오랜 시간의 도담이 흡족했는지 나의 채근에 마지못해 자리에 일어나면서 또 언제 연락할지 모르지만 전화번호를 서로 주고받았다.

끊어진 도연을 다시 잇기는 쉽지 않겠지만 우리 수련의 정수를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수련을 찾아 방황하는 것도 하나의 습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