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자극과 반응

수암11 2015. 12. 19. 19:27

 

자극과 반응

 

생명유지를 위해 인간은 자극에 쉽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졌다. 자극은 외부나 내부의 모든 자극에 쉬이 반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이러한 반응은 생명유지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개 어느 범위까지는 자극의 반응에 조응하나 특정범위를 벗어난 지속적인 자극은 오히려 역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너무 미약한 자극도 자극으로서의 효과가 떨어져서 자극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신체기능이 퇴보한다. 그러나 대체로 점증적인 강도를 보일수록 소정의 단계까지는 그 반응에 조응하면서 소위 감내하는 능력이 커지게 된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훈련에서 도입해서 나름 특색 있는 과정들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거의 대부분 분야에서 망라하고 있어서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포함한다.

 

몸이 아프니 만사에 의욕이 없다. 인간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졌는데 외부의 자극에 별반 반응이 없을 뿐 아니라 약간의 자극조차도 버거워졌다.

 

참을성이 없어져서 약간의 기다림에도 지친다. 이런 힘든 상황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분명 있으련만 생각이 나아가질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결코 헛된 것은 없듯이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떨치기 어렵다. 몸이 힘이 드니 지나온 삶들을 자연 반추할 기회가 적지 않은데, 사실 그 모든 결과를 다 사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현재와 다른 수정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는 의문이 든다. 이런 생각이 처음에는 어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끝없는 좌절 속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보니 그 의미를 내가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에 찾아낼 수 있다면 내 삶은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이 생각은 그간의 힘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동안 한평생의 삶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졌기에 무척 곤혹스러웠었다. 이런 삶의 의미가 다시 태어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윤회를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삶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간 수련을 해오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뀐 줄 알았었다. 그러나 늘 죽음을 옆에 가까이 두고서 사노라니 그동안 지녔던 인식은 사라지고 오직 본능적인 두려움만 남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충분히 덤덤히 맞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기에 스스로에게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가장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필생의 목표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도무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하던 일이 몇 가지가 있었다. 가장 첫 번째는 수련이고 나머지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글 쓰는 부분은 두 종류로서 이미 상당분량 골격이 구상되어 있었고 여러 편의 글은 관련 등재지에 수록된 바 있어서 나머지 퍼즐만 맞추면 되는데 그 내용은 전통문화와 관련된 철학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건강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도 상당 부분 진전이 있었지만 몸소 체득을 통해 얻어야 되는 것인지 몇 년째 지지부진하고 있다. 직접 경험을 해서인지 베드레스트와 노화 관련 부분은 혈관, 체온 관련 분야를 포함해서 근래 각광 받기 이전부터 중요성을 깨달았다. 몸을 쓰지 않아서 근육량이 현저히 감소하고 빈혈의 새롭고도 중요한 원인이나 저체온으로 관련 장기에 이상이 오는 경우를 몸소 체험을 했고 아직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외부이 자극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신체적 고통을 겪노라면 운신을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 않았다.

무기력증은 수면장애와 더불어 외부에서 오는 전화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응당 모든 외부활동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길이 선연히 보이지만 무기력증은 그 길 따라 걷고픈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