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관련

세상과의 소통

수암11 2015. 10. 10. 21:45

 

세상과의 소통

 

 

이런 농담이 있다. ‘국제학술대회의 공식 영어는 영어가 아니라 어설픈 영어다각국에서 모인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영어에서까지 최고가 아니지만 학술대회 운영에는 문제가 없다. 즉 어설퍼서 소통이 쉽지 않지만 이미 소통하고자하는 마음이 충분해서 귀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통은 그 무엇보다도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흔히 소통을 사람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것도 있다. 소통은 흔히 개체와 개체 간의 소통을 의미하지만, 개체의 존재성은 개체가 소속된 세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사람과도 소통이 필요하지만 세상과도 소통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통에 대한 사고를 조금 더 확장할 필요도 있으며 세상과의 소통에 과연 나 자신은 얼마만큼의 마음을 열고 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삶이라는 부분에 대해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한 생이라는 개념 속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필요에 의해 한 생이 단 한 번의 삶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삶을 나누어 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만약 여러 번에 걸쳐 누적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 있다면 삶 자체의 패러다임에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현재의 삶이 있기까지 이전의 삶, 여러 전생까지도 포함한 삶이 있을 것이고 현재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의 미래 뿐 아니라 이후의 삶까지도 염두에 두게 된다. 설혹 죽음이 갈라놓을지언정...

 

 

우리는 죽음 이전과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불가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단절시키지 않는 사고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라는 존재의 유무가 이 세계의 존재 유무와 어떤 관계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면 그 단절은 다소 무색해진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온갖 학문을 발전시켰다. 학문들 가운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듯한 분야도 없지 않지만 끊임없는 의문과 더불어 때로 언어의 유희나 비교개념을 동원해서까지 소위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추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이다.

 

 

우리는 보어의 상보성 개념에 대해 이미 이야기 하였고 우주가 인력과 발산력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힘이 지니는 조화에 의해 균형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즉 죽음은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단절의 의미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 세월 속에 풀어낸다는 진정한 의미가 와 닿지 않는가?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많은 방법들을 고안해 내고 있다.

 

 

만약에 아주 힘든 과정이 이미 지난 일에 대한 대가이거나 언젠가는 다가올 원하는 일의 반작용이라면 훨씬 더 감내하기 편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념은 우리 선조들이 항시 지니던 인과율과도 관련이 있다. 소박하다는 인식 이상 생각되지 않던 부분이지만 수많은 세월 속에 죽음을 넘어 이어지는 삶이라는 명제 내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생들을 이어서 살기 위해 노력한 존재이다. 그러한 질곡과 고통이 한편에서는 천손민족의 장자이기 때문에 짊어지고 가야하는 숙명처럼 언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시대에 다른 나라나 민족에 비해 아쉽고 부족하다는 비교심리만 두드러지고 남아 있다.

 

 

현실의 어려움은 그에 대한 더 이상의 반작용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보상심리가 없지 않다. 좋은 일에 마가 깃들 까 하여 마냥 기뻐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우리 민족에게는 극도로 암울했던 시기가 적지 않게 있었다. 극도로 수많은 어두운 시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일이라는 표현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기적 같은 일련의 일들이야말로 우주에 있어 균형을 이루는 인력과 발산력의 극적인 조화라 하겠다.


 

사교춤을 출 때 상대와 함께 춤을 추는 동작에서 서로의 밀고 당기는 장력을 텐션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서로의 힘의 조절 강약을 말한다. 이것은 두 사람 간에 타이밍이 매우 중요한데 큰 동작을 위해서는 큰 텐션이 필요하고 작은 동작에서는 작은 텐션이 필요하다. 춤에서는 미리 알고 준비를 하지만 세상살이에서는 쉽지 않다. 난리라도 나면 그 여파는 온 나라에 많은 이에게 오랫동안 죽음과 더불어 고통을 준다.

 

 

오랜 시련은 감내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 카드를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구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감내할 수 있는 맷집, 내공이 있어야 한다. 감내하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리면 소멸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력과 발산력이라는 상반된 두 힘의 균형과 조화가 의미하듯 변화폭이 클수록 반작용이 커 급격한 사회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현생 인류가 존재하고 있지만 제한된 일부가 살아남았을 뿐 수많은 민족들이 사라지거나 소수민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데 변화의 속도는 빠르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방법이다.

 

 

사실 현대의 급격한 변화들은 문명의 발달이라는 포장으로 가려졌지만 터무니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으며 부작용이 오히려 순기능에 비해 더 두드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용되는 것은 이런 역할 때문이다.

 

 

근대와 현대의 큰 세계대전은 그만큼 큰 희생의 대가로 문명의 발전을 앞당겼다. 선과 악을 단순한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사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맛을 알지 못한다. 남과의 소통,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삶조차 건너 뛰어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이루지 못하면 남이 이룰 수 있도록 보탬이 되도록 노력을 하고 이생에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음 생을 기약하면 되는 것이 조화선국으로 가는 밑거름이기도 하다.


지난 시대에 우리가 닦아놓은 소통의 이런 의미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