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 신박 : 북한의 의료실태 - 이상한 나라 이야기-3
[펀글] 신박 : 북한의 의료실태 - 이상한 나라 이야기-3
강상리 외국인 숙소에는 3등실 1칸에 진료소가 개설되어 있으며 1차 부지조사단을 위해 평양 친선병원에서 파견된 허웅룡 박사와 내과의사 1명, 외과의사 1명 외에 간호사 2명이 조사단 도착 수주 전부터 상주하고 있었다.
신포 도착 후 며칠이 지난 뒤 야밤의 술좌석에서 침을 맞을 수 없느냐고 운을 떼었더니 신덕균 책임지도원 왈 ‘내가 책임지고 조직해 보갔어’
다음날 저녁식사 후 안내원의 통고를 받고 따라간 진료소에는 3명의 의사와 40대 중반의 간호사 2명이 첫손님을 받는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3등실의 좁은 방에서 경직된 자세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외국인 숙소는 중앙현관을 경계로 우측의 객실은 우리측 조사단 일행이 사용하고 좌측 객실은 북한의 안내원들이 사용하는데 3등실은 화장실이 딸린 3~4평 정도로서 돗자리를 깔았으며 싱글침대 2개와 작은 책상, 옷장, 냉장고와 TV가 비치되어 있다. 진료소는 싱글침대 한 개를 치우고 냉장고에 대부분의 의료기구와 약품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비치된 약품이나 의료기구들은 위생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로 보였다.
얘기하기가 창피했지만 북에 오기 보름 전에 스키를 타다가 왼쪽 어깨가 빠졌으며 아직까지 팔을 제대로 들 수가 없어 침을 맞으러 왔노라고 했더니 허웅룡 박사가 왼쪽 팔을 이리저리 들어보라고 한 뒤 침을 11곳에 주고 침놓은 자리에 부황을 떠주었다.
침은 우리 측의 침보다 조금 더 굵고 길어 보였으며 침을 꽂은 뒤 손톱으로 침상단의 코일을 살살 긁다가 가끔씩 톡톡 치며 작은 충격을 주는데 감각적으로 침을 놓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황을 뜨는데 검붉은 피가 부황컵에 절반 정도씩 뽑혀 나왔다. 전체 진료시간이 약 40분 정도 걸렸는데 그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료 후 팔을 들어보라고 해서 들어보니 어깨 뒤쪽만 조금 결리고 팔을 들어 올리고 돌리기가 한결 편해져서 대단한 침술이구나 하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서양의학 박사가 어떻게 침술이 뛰어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양의술에 조선 고유의 한의를 접목시켜 인민공화국 의술로 개발한 것’이라는 대답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첫날 이후 허박사에게 어깨 탈골부에 대한 치료로 침 및 부황치료로 2 회, 왼쪽 귀 이명치료로 침과 비타민 B12-1200 주사치료를 더 받았다.
주사치료는 주사바늘을 침놓는 혈에 깊게 찔러 주사하는 처음 보는 주사방법이었으며 약 10 분 경과 후부터 치료효과를 계속 물어볼 정도로 자신의 의술에 자신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을 믿고 몸을 맡긴 환자를 칭찬하는 등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특유의 소질을 가진 의사였다.
우리에게 치료비를 얼마나 받는지에 대해 질문하자 공화국 공민과 재외동포에게는 무료로 진료하지만 우리와 같은 경우는 KEDO의 일원이므로 돈을 받는다고 했다.
침은 1 대당 1 달라, 부황 0.5 달라.
우리는 의료보험이 있어 값싸게 4달라 정도에 진료 받을 수 있으며 같은 한민족이고 경수로 건설을 위해 온 것이니 만치 북측에서 협조하는 차원에서 좀 눅게(싸게) 해 달라고 하자 자신들의 의료가격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단가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싼 가격이라고 하더니 처음 15 달라를 부른 치료비를 10 달라로 깎아 주었다.
이틀치 치료비를 지불하자 즉각 영수증을 발행해 주었다.
치료 후에는 마사지도 하니까 같이 온 일행들에게 많이 이용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진료 중 남측의 진료형태와 의술수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하여 아는 대로 답변해 주었으며 북측에서는 한의와 양의를 같이하는 조선 특유의 의학을 수립했다고 또 한번 자랑을 하였다.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원전건설의 지연에 대한 우려와 건설에 따른 1차 조사단의 목적 및 현재까지의 경과에 대하여 실무자 이상으로 알고 있었으며 북측의 열악한 상황을 미화하면서 남측이 신뢰를 가져야 된다고 강조했다.
허박사는 그 후 3월 7일 평양으로 돌아가 외국인 전담의사로 봉사중이며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날 귀 이명치료로 진료한 침 및 비타민 주사비는 15 달라인데 무료로 해 주겠다고 하여 만년필 1 개와 마르보르 담배 2 보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평양에 간 뒤 두 차례에 걸쳐 전화로 안부를 전해왔다고 안내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의 왼쪽 어깨 침 치료 효과는 우리 조사단에게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측의 요구로 진료종목별 가격이 현관 유리창에 붙게 되었으며 두 명이 침 치료를 받고 여러 명이 안마시술을 받았다.
침 치료는 허박사가 평양으로 돌아간 뒤 상주하는 외과의사가 하였는데 치료효과가 신통치 않았는지 북한의 침술을 입술이 마르도록 칭찬한 나는 조사단 일원으로부터 침술이 통하는 체질로 분류됐으며 애꿎게도 외과의사는 돌팔이로 불려지게 되었다.
안마시술은 더욱 이상했다.
40대 중반의 아줌마 간호사로부터 전신안마시술(?)을 받을 수 있다는 황홀한 환상은 50대 중반의 내과의사가 거친 손으로 멘소래담을 잔등에 바르는 순간 산산히 부셔졌다.
손으로 하는 전신 마사지는 15 달러, 기계 마사지는 10 달러, 부분 마사지는 5 달러. 부르는 게 값이 아니라 이 가격 역시 2 번에 걸친 장시간의 가격협상을 통해 정해진 값이다.
어깨 부분 마사지를 이틀 간격으로 받으며 두 의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간호사 두 사람은 무언가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계속 속삭이곤 했다.
우리가 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진료소에서는 의사와 간호사가 한 조가 되어 교대로 현지 주민들에게 의료봉사를 나간다는 것과 진료과목 중 치과치료도 내과나 외과의사가 직접 한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으며, 항상 무료진료만 하다 보니 우리가 지불하는 달러와 외화와 바꾼 돈표의 거스름 계산에 능숙하지 못했다.
4월 30일은 일요일로서 북측안내원들과 같이 숙소 마당에서 족구시합을 하며 휴식시간을 가졌다.
방룡수 안내원은 나와 동갑인데 아침 조깅 시 도립을 자유자제로 하기에 물어봤더니 김책공대 축구부 골키퍼를 했었다고 하여 콘테이너 두 개를 골문으로 하고 페널티킥 승부를 하였다.
3월 강아지 콧잔등 성할 날이 없다고 했던가?
골문 좌측으로 낮게 날라 오는 볼을 몸을 날려가며 멋있게 쳐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관성으로 콘테이너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별이 번쩍하고 머리가 띵해지는 게 이곳이 황천인가 싶었으나 다시 몸을 추스르고 포지션을 바꿔 볼을 차러 가는데 뭔가 뜨뜻한 게 흘렀다.
놀라서 우르르 모이는 안내원과 우리 조사단원들을 뒤로 하고 내방에 들어가 거울을 비춰보니 이마 위 가르마를 타는 부위에 약 5 cm 정도 찢어졌는데 약간 함몰되어 있었다.
흐르는 피를 거즈로 막고 보무도 당당하게 내가 남달리 애용하는 진료소로 향했다.
진료소에는 외과의사가 주민 의료봉사를 나가고 내과의사와 간호사 한 분이 분주히 소독약이야 봉합사야 봉합바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과의사는 페널티킥 승부차기 시합을 구경하다가 다쳐서 피를 흘리며 들어가는 전 과정을 보고 진료소에서 치료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집게손가락 길이의 낚시바늘 모양의 봉합바늘에 무명봉합사로 두꺼운 두피를 뚫어가며 5 바늘의 봉합시술을 약 1 시간에 걸쳐 받았다.
간호사의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머리를 깎아내고 마취주사 없이 봉합을 했다. 남쪽 사내의 의연함을 보인답시고 관운장처럼 버틴다는 조사단원들의 놀림을 귓가로 흘리며 발바닥에 힘을 주며 참는데 시간은 왜 그리도 길기만 한지........
내과의사는 더욱 가관이었다.
겨우 한 바늘 봉합하여 당겨 묶는 도중 무명실이 터지지 않으면 두피가 찢어지는데 50중반의 의사가 봉합수술이 처음이라는 대목에서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한전 최규은 과장은 왜 마취주사를 놓지 않느냐, 무슨 놈의 봉합바늘이 낚시바늘보다 더 험악하냐, 소독은 제대로 되었냐 등등으로 항의를 했지만 소독기구래야 알코올에 솜을 적시는 게 고작이고 마취약이 없음은 물론 무명 봉합사에 낚시바늘 모양의 봉합바늘이 있는 게 다행인 다음에야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장황스런 시간이 흘러 봉합시술이 끝나고 페니실린 주사를 맞은 뒤 밤새 주사 쇽크로 혼이 났다.
이튿날 상처부위를 드레싱하고는 또 페니실린 주사를 놓자기에 의학상식이 없다는 질책을 들어가며 조심스레 거절했다.
파상풍을 방지하기 위해 페니실린 주사를 맞아본 기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페니실린 주사약의 유효기간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사약병의 외관이 더러웠다.
파상풍 예방은 항생제 복용으로 충분한데 항생제가 없으니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것이고, ‘준비해 온 항생제가 있으면 복용하라’는 처방이 이를 반증함이 분명하지 않는가?
북측 진료소에서 두 번의 드레싱을 끝으로 우리가 준비해 간 소독약으로 소독하고 항생제를 복용하며 지내다가 일주일 후 실밥을 빼러 다시 진료소에 들렀다.
자신들의 시술을 믿지 못하는 나의 처사를 질책하는 의사들의 인상이 완연했다.
침과 안마로 다져놓은 북한 의사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다시 되살린다는 것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마찬가지였다.
거북스러운 분위기를 인내하며 실밥을 뽑은 다음날 다시 진료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외과의사가 벌써 노안인지 실밥 한 땀을 덜 뽑았던 것이다.
실밥을 완전히 뽑은 이틀 뒤 전문가 협상이 마전휴양소와 강상리 외국인 숙소 두 곳에서 열렸다.
이때 한일원자력병원에서 원장님과 수간호원 한 분이 같이 오시게 되어 우리 조사단 전원의 건강을 Check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나의 살신성인(?)으로 전모가 드러난 북측의 의료실태에 대하여 북측과 협상 시 논란이 일게 되었다.
북측의 입장은 의료실무자 협상이 진행 중이니 만치 현재로서는 진료소의 의료수준 이상은 곤란하다는 입장만을 고수하였다.
만약의 사고로 긴급후송이 필요할 경우 수술을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병원급 소재지는 함흥시인데 비포장 길을 전속력으로 달려도 1시간 40분이 소요되는 상황에 대한 긴급후송대책이 무엇이냐는 우리 측의 요구에 북측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조심해서 다치지 않는 것이 많이많이 좋다’
‘설사 그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한 핏줄의 동포가 죽어 가는데 가만히 있겠느냐’
등의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역공격으로써 확실한 대답을 교묘히 회피했다.
우리가 소지한 구급약이나 주사약 등을 제공하면 북측에서 치료를 해 줄 수 없느냐는 우리의 제의마저도 ‘남측의 의료품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한마디로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1차 부지조사 기간 중 몸으로 떼워 가며 알게 된 북측의 의료실태를 보고 느낀 것은 몇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 우리와 같이 현대화된 의료시설이나 질 좋은 의약품이 없다.
둘째, 의사 역시 경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의료경험이 일천하여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다.
셋째, 대북 경수로 공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될 경우 부지 내에 우리 측의 병원이 개설되고 우리 측의 의료진이 상주하여야 한다.
넷째,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남측으로의 긴급후송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북측진료소와 연관된 많은 우여곡절은 4월 21일 귀국길의 고려호텔 지하의 실내수영장에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전날밤 창광거리 술집의 대단했던 접대가 언제였냐는 듯(물론 돈은 우리가 냈지만...) 평양 시내구경을 하자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전 최규은 과장과 함께 호텔 실내수영장에서 한참을 놀았는데 옷 입고 머리를 말리는 도중 상처 부위를 살펴보던 최과장이 나폴거리는 7~8 mm 길이의 무명 봉합사 한가닥을 뽑아들고 웃었다.
“그 돌팔이, 정말로 노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