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펀글] 신박 : 북한사람들과의 회의 - 이상한 나라 이야기-2

수암11 2015. 9. 20. 16:12

 

[펀글] 신박 : 북한사람들과의 회의 - 이상한 나라 이야기-2


북한사람들과의 회의


익히 짐작이 되고도 남겠지만 북한에서의 현장조건은 우리와는 너무나 판이하며 무엇보다도 북측으로부터 제공받아야 할 장비나 물품에 대한 가격협상 시 생전 경험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수차에 걸친 회의참석의 경험과 술자리에서의 음담패설을 거쳐 북측인사와 자연스러운 인사가 오갈 때쯤이면 조사단 각자가 당하거나 느낀 Behind story가 축척되어 옳건 그르건 자기 나름대로의 북측 실상에 대한 판단능력이 자생하게 되고 그때가 되어서야 아항! 그렇구나 하며 북측인사와의 대인관계나 회의 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과 똑같이 밀고 당기고하는 대응력이 생기게 된다.


KOPEC인이라면 누구나 만능 Entertainer는 아닐지라도 초면의 상대를 만나서도 상대가 까다롭든 성가시든 상관치 않고 원만한 협상결과를 이끌어낸 뒤 같이 소줏잔을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지 않는가?


이러한 자부심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참석한 보장회의 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알량한 인내심을 견디다 못해 붉어지는 얼굴색을 감출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뭐가 그리 복잡하고 절차가 까다롭소’하는 투의 발언을 했다가 회의 시에 기본적인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다리 건너 회의에 참석치도 않은 다른 안내원을 통해 들었을 때, 그간의 소소한 일로 인한 기총사격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나로서는 대포 한방을 맞은 바와 다를 바 없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인내심이 없으며 다혈질이다 못해 회의 시 기본예의도 모르는 무뢰한인가?


나의 판단으로는 자원연구소의 최 영섭 박사가 나보다 더하면 더했으며, 협상대상인 북측인사들은 도대체 회의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회의 시 상대편에서 의견을 개진하면 그 의견에 대해 동의여부를 밝혀야 하며 동의하지 못할 경우에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토론을 거듭하여 서로가 수긍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나가야 함이 옳지 않은가?


보장회의라는 것이 북이나 남이나 모두 자신의 목적을 최대한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양자간의 대화를 통한 협상에서 서로가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서로가 절충안을 찾아야만 끝이 나는 회의가 분명할지라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부지조사시의 회의는 오로지 대남방송이나 대북방송을 누가 열심으로 끈질기게 기죽지 않고 하느냐이며, 양측이 모두다 진을 다 빼고 나서야 결론에 도달하는 인내심과 자존심의 대결장이며 시간과의 줄다리기였다. 강상리 외국인 숙소에서 날마다 몇 차례씩 열린 회의에서 결론 없는 회의에 짜증이 났으나 계속되는 보장회의와 실무자회의를 거치고 나서야 다음의 내용들이 정리되었다.


첫째, 북한에서의 모든 상황들은 우리 쪽의 상황과 비교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소용접이나 수압시험 시에 40kg 들이 산소통이 필요하여 물가정보에 나오는 가격과 규격을 북측에 제시하고 지원을 약속 받았다고 했을 때 확실한 것은 가격뿐이다(가격은 모든 대상이 마찬가지이지만 통상적으로 1.5배 이상임).


약속날짜에 맞춰서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서 수시로 확인하여도 약속날짜를 넘기기가 태반이며, 공급된 산소의 규정압력은 120 Kg/cm2이 되어야 하나 30~70 Kg/cm2 으로 들쭉날쭉 할뿐더러 산소통의 여유분 마져 수량이 부족하여 사용분을 반납하여야 재공급을 받을 수 있는 실정이다(결국 우리나라에서 산소통 2개를 전문가회의 시 공수 받아 작업하였음).


둘째, 회의에 절대로 조급하게 임하지 말아야 한다.


회의에 참석하는 북측의 협상자는 협상실무자일 뿐이지 결코 결정권한을 가진 책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협상대상에 대하여 갖고 나온 조건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정회를 거쳐 다시 속개회의를 하는 쳇바퀴 돌기가 계속될 수밖에 없으므로 항상 빨리빨리, 명쾌하게라는 우리 식의 몰아가기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따라서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북측 협상실무자가 요모조모 따져가며 당의 허락(?)을 받아오도록 시간을 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하며, 받아온 허락사항조차 절충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국제시세 근거를 들이대며 이해를 시키거나 경수로 사업의 시급성을 설파하고, 심지어는 단일민족의 자랑까지 동원하며 그들과 같이 무한한 끈기와 인내로 대처하여야 한다.


셋째, 협상 시에는 항상 몇 가지의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 측에서 최상의 조건을 제시하면 십중팔구는 그 조건이 수용되지 않는데 북측이 속개회의 시에도 조건의 수정이 아니라 처음과 똑 같은 주장을 되풀이 할 경우에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된다.


즉 북측의 상황이 우리의 조건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자존심 때문에 억척스레 버티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를 재빨리 간파하여 방법이 다른 대안을 제시하여야 된다는 거다.


넷째, 금기사항에 대하여 철저히 언급을 회피해야 된다.


즉, 가격이나 제품의 질을 우리 것과 비교한다거나, 호칭을 우리 식으로 하는 등 북측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행은 공개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다섯째,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남과 북이 오랜 단절로 인한 접촉의 빈곤이나 다른 체제로 인한 사고방식의 차이로 협상에 다소의 곤란함이 있지만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은 역으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얼마나 좋은 터전인가?


이해관계를 떠나 술자리나 사석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나는 너에게 무엇이든지 다 보여줄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을 때 협상 시 일방적인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는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려는 노력이 역력히 나타났으며, 협상 후 서로가 웃는 가운데 덕담을 하면서 회의장을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가 빈번해지게 된다.


여섯째, 협상과 관련하여 감사나 사과의 표현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협상이 잘 되었다고 해서 협조해 주어서 고맙다거나 협상 시의 일로 해서 미안하다는 등의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존심 강한 북측인사들에게 당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춰지며, 이는 언행의 신뢰도 문제까지 비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때그때의 협상상황에 따라 적절히 이 조건이 수용되지 않으면 안 되니 언제까지 답을 갖고 찾아달라고 역공격을 하거나, 충분한 설명으로 이해를 구한 뒤 선생이 결정하면 되는 일을 어렵게 하지 말자는 등의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도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북측과의 협상에는 정도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끝으로 회의 시 일어났던 두 번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두 번 다 우리 측의 단장인 KEDO의 John Hooge와 북측 김 성수 단장사이의 대화로써 항상 북측의 일방적인 억지와 터무니없는 요구조건에 시달리다 KO Punch를 날린 두 번의 사건이었다.


- 첫 번째 에피소드


우리는 회의 때마다 금강산관광에 대하여 북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왔으나 북은 이런저런 핑계로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Hooge: 김 단장, 회의시마다 매번 금강산관광에 대하여 요청을 하였지만 귀측에서는 만족할만한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

 

김단장: Hooge선생, 선생은 왜 우리가 북남으로 갈라져서 동족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아십네까? 나 역시도 남에서 오신 부지조사단의 여러 선생들에게 아름다운 금강산을 보여드리고 싶습네다.


Hooge: 저 역시 남한에서 외교관으로 3년 이상 근무한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도 더 남북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단장: 그렇다면 휴전선의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장벽을 보셨갔지요?


Hooge: 물론, 콘크리트 장벽뿐만 아니라 귀측에서 만들어 놓은 땅굴 속에도 가보았습니다.


김단장: ............


Hooge: 결코 정치적인 발언은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부지조사단이 이토록 휴가도 가지 않고 열심히 경수로 사업을 위해 일하는 대신 금강산 구경을 한번 가자고 하는데 귀측에서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허락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측이 허락을 해 주어야 금강산을 갈 수 있는 상황이니까 김 단장의 적극적인 노력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산 관광을 이렇게도 원하는데 귀측의 통제로 인해 구경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 부지조사단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귀측에 대한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말할 것입니다. 김 단장께서는 이점을 유의하시고 노력해 주십시오.


결국 우리는 금강산 관광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비록 사석이지만 북측의 김 단장으로부터는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했으나 구경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 두 번째 에피소드


3월 초에 부지경계측량을 완료하고 측량말목의 보호를 위해 콘크리트 보호대 설치 문제로 회의를 가졌다.


김단장: KEDO에서는 경계측량말목의 보호를 위해 굳이 콘크리트 보호대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우리 조선인민민주공화국의 건축법에는 부지의 사용자가 그 일을 해야 된다고 되어 있습네다.

  

Hooge: 우리는 귀측의 법을 존중하나 귀측법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KEDO와 DPRK는 의정서에 따라 협의해야 됩니다. 또한 귀측 법에 따른다고 할지라도 아직 부지인도가 되지 않았으므로 현 시점에서 KEDO가 사용자가 아니므로 귀측에서 보호대를 설치하고 부지를 인도해 주면 부지 내에서의 사용은 우리가 할 것입니다.


김단장: 좋습니다. 누가 콘크리트 보호대를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밝혔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에 많은 얘기를 하면서 토론해 봅시다.


Hooge: 보호대 설치 이전에 귀측에서 경계말목을 귀측에 유리하도록 옮길 수도 있습니다.


김단장: 측량말목은 현재 상태 그대로 보존될 수 있습네다.


Hooge: 비로 인해 유실되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김단장: 주민들에게 주의를 주고 다치지 말도록 통보했습네다.


Hooge: 소나 들짐승들에게도 통보했습니까?


김단장: .........말뚝을 없앨 짐승은 없습네다.


Hooge: 제 눈에는 짐승들이 자주 보입니다. 짐승들까지 당의 명령을 따른다고 장담하십니까?


김단장: ...........


경계측량말목의 보호대 설치는 결국 북측에서 설치하되 설치비는 KEDO에서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6월말에 작업을 완료하였다.


이상에서 북측과 회의 시에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과 에피소드 두 가지를 적었는데 외교관 출신인 Hooge의 번뜩이는 재치는 우리 기술자가 배워두어야 할 회의시의 기법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