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화신 일본
악의 화신 일본
북한의 행동양식은 밤에 불 보듯 명약관화한 것이어서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은 전혀 다르다.
물론 6.25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을 합친 한국민의 인명 손실은 무려 520만 명 선이다. 참으로 엄청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는데, 특히 비전투요원의 인적 손실이 전사상(戰史上) 유례없을 만큼 컸다는 점에 6·25전쟁의 비참성이 있다. 이산가족의 수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개 1,000만 명 규모로 추산한다. 물적 손실은 남북한 모두의 사회 및 경제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지만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마치 악의 화신과도 같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음양 관계에 있다고 하였는데 악의 화신이 음양 관계라니 정말로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형적인 수법은 내부의 분란을 수습하기 위해 외부를 타깃으로 집중한다. 자연 가장 근접한 우리나라는 혹독한 고통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우리나라만으로도 모자라 중국과 동남아 지역, 심지어 미국까지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고서는 짐짓 입을 닦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본은 바다로 둘러싸여 다른 나라의 침입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단 두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한 번은 신라의 침입을 받았고 두 번째는 여몽연합군에 의한 신사동정인데, 이때는 때마침 발생한 태풍으로 인해 위기를 벗어났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제2상/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 295)에서 안정복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고 하였다.
또 《동사강목(東史綱目)》 제3상/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 2월조에
○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이라 적고,
【안】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
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이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하였다.
백마총과 관련된 일화는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의 《해사록(海槎錄)》(1636-1637)/문견잡록에서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인용했는데, 이미 그 이전 기록인 이경직(李景稷)의《부상록(扶桑錄)》/1617년 10월 18일(기묘)조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문집 《순암집(順菴集)》/순암선생문집 제1권/시(詩)/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에도 확인된다. 그리고 아정(雅亭)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65권/청령국지 2(蜻蛉國志二)/병전(兵戰)에서도 확인된다.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 1765~1814)과 그의 조카인 한진서(韓鎭書)가 함께 편찬한 《해동역사(海東繹史)》제41권/교빙지(交聘志) 9/일본(日本)과 통교(通交)한 시말(始末)에서 일본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학자 松下見林의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1)"의 기록을 인용하여
"-진나라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다.- 응신천황 22년(291, 유례왕8)에 신라의 군사가 일본을 공격하여 명석포(明石浦) 안으로 깊이 들어왔는데, 대판(大坂)과의 거리가 100리였다. 일본 사람들이 강화를 요청하여 백마(白馬)를 잡아 적관(赤關)의 동쪽에서 맹서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백마총(白馬塚)이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별집 제18권/변어전고(邊圉典故)/서쪽 변방[西邊]/왜국(倭國)조에도 나온다.
“일본 신응(神應) 22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경준(申景濬)《여암고(旅菴藁)》”
이 기록은 국내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바 조선통신사들에 의해 유입된 자료로 후에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일본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학자 松下見林의《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침입은 수차례 있은 것으로 확인된다.
Baidu百科/刀伊入寇에 의하면 “9세기 하반기 키타큐슈(北九州)의 연해는 신라의 소규모 해적들의 침입을 받았다. 977년 고려해적이 대거 일본을 침략하여,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사쓰마(薩摩)등 연해지대가 모두 피해를 입었고, 아마미섬(奄美島)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2)”고 합니다. 또 “寬仁 3년(1019)에 연해주 지역에 사는 여진족이 北九州지역을 침입하여 대마도와 壹岐島를 유린하고 筑前國과 肥前國을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건이 발생한다.3) 이때 肥前國 松浦郡의 무사 源知가 군내의 무사단을 이끌고 적선을 공격하여 물리친 일이 있었다.”4)고 하는데 Baidu百科 자료에 의하면 “일본주민 463명이 피살당하고, 1,28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나중에 고려해군이 해상에서 이 해적을 물리치고, 일본인 포로 259명을 송환해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663년 8월에 벌어진 백강(현재의 금강 부근 -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로 알려짐)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궤멸 당했다. 왜는 백제부흥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실시했는데,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제의 풍장왕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백제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세력은 궤멸된다. 백강전투는 일본에서 벌어진 전투는 아니었지만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꾼 전투로 《일본서기》에는 3번에 나누어 대략 사만 명의 병력을 지원했다고 적고 있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나 왜의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국내 정치에 반영하여 중앙집권화에 이용하여 내부의 위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여 일본이라는 율령국가 수립의 한 토대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중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납치를 금지하였으나, 실제로는 납치를 통해 일본통일 과정의 인적, 물적 손실을 보상 받고자 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 간 포로는 대체로 2~3만 명에서 많게는 대략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구문명과 교역을 시작한 일본은 포로들을 포르투갈과 인도 등에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임진왜란도 내부의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 보면 일본통일 이후 “필시 내부(內府)가 비전(肥前)ㆍ비전(備前) 등과 더불어 사이가 벌어졌으니, 그들을 평지에다 두어 둔다면 변이 생길까 두렵기 때문에 조선으로 보내서 그 군사의 그 기세를 소모”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인은 조금만 안일해지면 음모를 꾸민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조선을 타깃으로 삼았다.
임광의 《병자일본일기》 해제(解題)에서 문선규는 “덕천 막부는 지방의 대장들이 경제적으로 부하게 되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정책을 써 각 지방에 토목공사와 개발공사를 강요했었다. 그래서 고을마다에는 화려한 건축물과 교량이 있게 되었고, 남아도는 재력으로 지배계급은 사치를 한 것이었다.” 황호의 《동사록》에 “66주의 장관(將官)의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강호(江戶)에 볼모잡아 두고, 때로 상급(賞給)을 내려 여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전세(田稅)ㆍ호세(戶稅)를 줄여서 백성의 환심을 사려고 힘쓰나, 아랫사람을 제어하는 법은 형벌이 너무 중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또 심복(心腹)이 없고, 좌우의 집정도 역시 각각 당파를 나누어 서로 모함한다고 한다.”
관백이 새로 즉위한 뒤에 반드시 우리나라 통신사의 방문을 요청하는 것은 통신사의 힘을 빌려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 2005: 307).5)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5년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넘기고 순푸로 은퇴하던 무렵, 스루가 만은 대남만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에 많은 일본인이 해외로 이주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서군 측에 가담한 많은 다이묘가 숙청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따르던 많은 무사들이 신분을 박탈당했고, 일부는 낭인이 되어 해외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제3대 쇼군 이에미쓰가 1633년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고, 1637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시마바라[島原]의 난6)을 일으키기까지 일본의 무역은 막부의 주인장(허가증)을 얻은 ‘주인선’을 중심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도 많은 일본인이 동남아시아 각지로 이주하여 타이와 마닐라 등지에는 일본인촌이 형성될 정도였다.
장황한 설명은 일본은 태평양을 면한 섬나라로서 침략을 받으면 물러설 곳이 없는 지역이어서 외부 침략에 특히 민감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특히 백제계로 추정되는 일본 황실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일본의 연합군이 패한 적이 있으며 그들의 모국이 사라져버림으로써 위기의식이 더 잠재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환태평양지진대에 위치하면서 태풍의 경로에 자리하고 있어서 각박한 풍토도 한몫했으리라는 생각도 짐작할 수 있지만 오키나와나 이와 비슷한 동남아 지역인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세키까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를 하면서 도요토미 측에 가담했던 영주들은 에도(동경)에서 먼 곳에 영지를 불하받게 된다. 대표적인 번이 죠슈번과 사쓰마 번이다. 죠슈번은 혼슈 섬이 서쪽 끝에 위치하게 되었고 사쓰마 번은 큐슈 섬의 제일 남쪽에 위치하게 된다.
또 가족 인질들을 에도에 남겨 두어야 했고 영주 또한 에도에 일정기간 머물러야 하는 일종의 상수리제도, 기인제도를 두었다.
일 년마다 교대 근무를 통해서 영주들의 경제력을 떨어뜨리려는 취지였다.
에도에 사는 가족들과 일정기간 대규모 인원이 머물러야 하는 영주들은 거리가 멀수록 경비지출이 심하고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당시 막부에서는 쇄국정책을 썼는데 설탕은 밀무역 외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오키나와를 침략하게 되고 전 일본 설탕 독점권을 갖는다.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령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문화, 언어가 다른 독립국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 즙을 짜는 노동도 힘들고 잘못하면 손가락과 팔을 절단해야 했다. 끊임없이 타지 않도록 저어줘야 했는데 땔감은 오키나와 숲을 황폐화시켰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모두 사쓰마 번의 부채탕감을 위한 설탕생산에 매달렸지만 최소한의 식량으로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후에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를 희생시킨 덕으로 막부에 진 빚을 갚았고 서구 열강으로부터 무기를 구입,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메이지 혁명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나라에 행한 만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직도 한 번씩 밝혀지는 만행은 인간의 행위로 치부하기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삼일운동 당시 반수 정도는 석방되고, 나머지 인사는 재판에 회부하여 보안법위반·소요죄·내란죄 등의 죄목을 씌워 처형시켰다. 3·1운동 발생 뒤 그 해 10월까지 일제의 식민지 통치 법조문에 적용되어 구속된 자의 수는 1만 8000여 명이었다. 이것은 한 가지 사건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차세계대전의 일부인 대동아 전쟁, 일본의 제국주의화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1910년) 만주를 제국의 영향권에 넣었다.
중화민국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후 일본군은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는데 난징 대학살에 30만 명의 중국인이 희생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고도 부르며, 서구권에서는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731부대는 비밀부대로서 생체 해부 실험과 냉동 실험 등 치명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하며 생물·화학 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제731부대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 등 전쟁포로와 그 외 구속된 사람 등 3000명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함으로써 일본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려 조선인 6,000여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에 정신적 불안까지 겹치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생각에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우물에 독약을 넣고 부녀자를 강간하나”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위기의식을 조장한 후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야욕을 위해 주변 나라를 희생시키고 그 국민들을 잔혹하게 살해했지만 결코 시인하지 않는다. 자국 국민들도 잘 모르니 ‘설마 그럴라고?’ 반신반의한다.
그들은 수법은 항시 정해져 있다. 답이 궁하면 관심을 다른 쪽으로 쏠리도록 만든다. 그래서 여러 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들과 인접한 모든 나라와 영토분쟁이 없는 나라가 없다. 그러면서도 언제 건 문제의 소지를 미리 만들고 있다. 그것이 그네의 위정자들이 지닌 사고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을 되짚어 여론몰이를 하고 추후 여지를 만들어 놓는다.
그들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다음달 3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개최되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하기로 내용에 대해 “중립성에 문제가 있다”며 항의했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종전 70주년 관련 행사를 놓고 선별적으로 불참할 경우 오히려 중립성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렇듯 극히 작은 일에도 수많은 빌미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언젠가 그 카드를 사용하려 한다. 물론 중국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행한 잔혹한 만행과 침탈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독도 문제는 우리가 독도를 내어줄 수 없으므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위정자들은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논리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이 반성을 언급할 때에는 그 뒤의 행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언제라도 번복할 수 있으며 큰 문제는 작은 분란을 통해 희석시키는 이른 바 물 타기의 명수들이다.
독도를 비롯한 영토분쟁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도 계속 우기면서 분쟁으로 몰고 가야 내부적으로 이슈가 되고 결속이 되는데 유용하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6.25전쟁과 월남전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들의 부는 주변국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키나와조차도 사쓰마에 의해 복속 당하기 전에는 엄연한 독립 국가였으나 칼사냥을 당한 후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은 미군의 극동군 주둔기지가 되어 있다.
대마도에는 우리나라에서조차 희귀하거나 보유하고 있지 아니한 불교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연대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는 7세기의 백제불ㆍ8세기의 신라불로부터 고려ㆍ조선시대의 불상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 불상의 특징은 고려불상이 가장 많고 대부분이 운반하기 쉬운 소형의 청동불이요, 모두 심한 화상을 입어 도금이 없으며 대부분 과거 왜구의 본거지였던 포구(浦口)에 집중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이즈하라 다구쯔다마[多久頭魂] 신사에 쓰쓰[豆酸]의 대정(大鉦)의 이름으로 알려진 고려(1245년)의 금고(金鼓)를 포함한 고려시대(1357년) 진주에서 만들어진 금고. 그리고 많은 고려의 거울(鏡) 역시 왜구들의 약탈물인 것을 알 수 있다.
왜구들의 약탈문화재는 이외에도 희귀한 불경 등을 포함되어 있는데, 김의환(1985)은 “일본인 불교 미술 연구가들은 대마도에 산재해 있는 많은 고려 불상을 자랑하여 말하기를
‘고려시대의 불상은 거의 한국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의 불교미술을 쓸 때 고려시대의 불상에 대해서는 대마도에 오지 않으면 쓸 수가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자랑에 앞서 과거 왜구들의 방화ㆍ약탈의 잔인성을 역사적으로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김의환, 1985: 83-90). 불화의 경우 현존하는 100여점 중 일본에 90여 점이 있을 정도다.
아이러니 하게도 메이지 정부에 의해 단행된 폐번치현(廢藩置縣)이래 대마도는 현재까지 나가사끼현에 소속되어 오고 있는데 해방 전인 1932년 나가사끼 현회(長崎縣會)에서 대마도 개발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혁신계의 후지마쓰모(藤松某)라는 사세보시(佐世保市) 출신 의원이 ‘대마도를 나가사끼현에서 분리시켜 조선총독부의 행정 구역으로 이관시키라’는 발언을 하여 일본 국내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발언의 이유를
“이 발언은 대마도의 도민을 위한 것이다. 대마도에서 하까다(博多)로 가서 다시 사가현(佐賀縣)을 지나 현정 소재지인 나가사끼까지 가는 것은 불합리하다. 지사를 비롯 현의 관리가 대마도로 출장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러한 결과 현의 대마도에 대한 시책이 뒷전이 되지 않는가? 나가사끼현보다 더 큰 조선 총독부의 소관으로 하면 예산도 많이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대마도를 조선에 이관 시켰더라면 오늘날 한국 국민이 되었으리라.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더불어 물 하나를 서로 바라보며 우리의 품안[撫育]에 있는 것이어늘, 전조(前朝-고려)가 쇠란하였을 때에 〈그 틈을 타서〉 경인년으로부터 우리의 변경을 침략하였고, 군민을 죽이었으며, 가옥들을 불사르고 재산을 빼앗아 탕진하였다.7)
의지(義智)란 자는 왜국 주병대장(主兵大將) 평행장(平行長)의 사위로 또한 수길의 심복 부하였다. 원래 대마도 태수(太守) 종성장(宗盛長)은 대대로 섬을 지키고, 우리나라를 섬겨오던 터였다(징비록).
일본은 지금도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 타깃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헌법을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자신들의 결속을 위해 주변에 위기를 조장하는 악의 화신이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각축장인 우리나라에 있어 중국의 소수민족문제나 동북공정도 물론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일본의 위협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행해왔었고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가 《교린제성》에서 밝힌 ‘성신(誠信)의 교제’는 한바탕 꿈일 따름인가? 그들은 과연 우리나라에 대해 성신과 교린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우리나라와 음양 관계에 있다는 의미는 아마도 천손민족의 장자 손으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자위해본다.
1) 이 책은 1688년에 막부(幕府) 시대 초기 국학자(國學者)의 한 사람인 송하견림(松下見林 1637~1702)이 지은 것으로, 《해동역사》의 인용 서목에 직접 올라 있을 뿐만 아니라, 교빙지(交聘志)나 본조비어고(本朝備禦考) 중의 일본 관계 부분에서 활용 빈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정선용鄭善溶, 1996, 《해동역사(海東繹史)》 해제)
2) http://baike.baidu.com/view/5531731.htm
3) 이 사건은 寬仁 3년(1019)에 일어나는데, 일본사에서 ‘刀伊의 賊’ 이라고 부른다.
4) 金普漢(2004: 153). 東아시아의 經濟 圈域에 있어서 약탈의 주역, 海賊과 倭寇, 中國史硏究, Vol.29, 중국사학회
5) 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2005: 307).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한길사
6)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 반도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주축으로 한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막부는 다음 해가 되어서야 이를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다.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했는데도 다이묘들이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것이 원인이었다.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7) 세종 4권, 1년(1419) 5월 29일(계유) 7번째 기사/대마도 수호에게 보내어 화친할 것을 말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