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스킨십

수암11 2015. 8. 25. 09:26

 

스킨십


처음 외국영화를 접했을 때 이성 간에 나누는 가벼운 스킨십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어리고 젊은 시절이어서 이성과의 접촉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스킨십은 이성과의 접촉에 있어서 로망처럼 느껴졌다. 부지불식간에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나 보다. 청춘의 남자들은 그런 스킨십에서 성적인 접촉과 관련해서 생각하기 마련이고 물론 나 자신도 그런 기질이 전혀 없다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킨십을 욕망의 연장선으로만 이해하려 든다면 명약관화한 일이어서 욕망의 끝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다.


그런데 세상을 살면서 좀 더 경험이 풍부해지고 사고가 유연해지면서 이런 생각을 실천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성과의 인사를 포옹과 볼 키스로 갈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시도하는 나 자신도 그렇지만 받는 이성 쪽에서도 처음은 ‘이게 뭐지?’ 하고 다소 혼란스러웠을 수 있으나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고 분위기 상 불쾌한 감정보다는 신선하고도 인상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서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래서 특정 모임에 가게 되면 나만 유독 포옹과 양볼 키스로 인사를 하고 작별인사 또한 그리 해주었으며 모두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했다. 혹시 그런 인사를 하면서도 빠뜨린 사람이 없도록 배려해야 했는데, 모르고 빠뜨리면 서운해 했고 나의 그런 스킨십을 다른 남자들은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또한 상대방도 나의 스킨십에 전혀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 간에 즐겼다.


이런 스킨십은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는 두지만 유대관계에 아주 효과적이어서 세월이 많이 흘러도 다소 긴장을 풀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배려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충분한 자제심을 발휘하는 편이다. 그것은 서로 상대적이어서 내가 상대를 믿고 있다는 신뢰를 보여주게 되면 그 신뢰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심리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접촉 초기에 오버하여 자제심을 잃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상처를 주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몹시 곤혹스러울 수 있다.


눈에 띠게 힘들어 하는 여성에게 배려심을 발휘하여 가벼운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내 의견을 잘 받아 주기에 다행이다 했는데, 늦은 시간에 자꾸 같이 시간을 보내자는 듯 의사를 보여서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수용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두어 번의 만남 뒤에 내게 조심스럽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전혀 스킨십이 없었다. 내가 스킨십을 하는 경우에는 여러 명이 있을 때 모두에게 동시에 하는 것이어서 개인적인 만남에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도 50대 초반에 아이가 둘 있는 유부남이었고 그 아이는 삼십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한 번에 훅 빠지면 남녀 할 것 없이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그날의 만남을 끝냈다. 그러고는 다음날 낮에 후배지만 높은 수준을 지닌 측근에게 조심스레 자문을 구했다. 그 아이에게 가급적 상처를 주지 않고 끝낼 방법을 알려 달라고 전화로 부탁을 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면서도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결과는 아주 훌륭했다. 조금의 상처를 입지야 않았겠지만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너무도 예뻐서 볼 키스를 해주고 애정을 표시하면서 딸을 삼았다. 세월이 좀 지났고 그 아이는 결혼을 해서 딸 가진 엄마가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 아이 남편을 포함한 가족과 상봉할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는 자칫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 세상에서 애정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내 경우의 볼 키스는 가볍게 양 볼끼리 부딪히는 게 아니라 입술로 가볍게 볼을 터치한다. 사실 볼 키스하는 방법을 잘 몰랐기에 내 식으로 그리한 것뿐이다. 한 그룹의 여성들과의 모임에는 소정의 순서를 지켜 볼 키스를 하지 않으면 토라지곤 해서 순서를 명심해야 했었다. 그들과 얼마나 편했느냐 하면 울산 정자 바닷가에 놀러를 간 적이 있었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해변 모래사장을 덮었는데도 눅눅하지 않고 쾌적하였다. 준비해간 돗자리를 모래바닥에 깔고 모두 누웠다. 돗자리가 좁아서 양팔을 뻗어 세 명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모두 꼭 붙어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한참 곤하게 자다가 떠드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일행 중에 다른 남성이 우리가 모두 밖으로 나간 뒤에 잠잠하기에 웬일인가 찾으러 나왔다가 못 볼꼴을 본 것이었다. 남정네의 팔을 베고 세 여자가 양쪽에 꼭 붙어 다정히 자고 있는 모습은 질투의 화신으로 변하게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본인은 이성들과 꼭 붙어 팔베개를 내어주고서도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잠을 잤기에 큰소리에 조금 민망했을 뿐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것은 소통의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중년의 여성들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대화상대에 굶주려 있다. 그런 대화 상대가 부담이 없는 이성친구라면 훨씬 더 소통이 원만할 것이다. 그런 태도가 사랑스러워서 달리해줄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 자연스레 볼 키스를 해준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경험은 전후 무후한 인상적인 경험이었나 보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근래에도 카톡이 온다. 하지만 혹여 더 이상의 오해가 생겨나지 않도록 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반가움을 대신하여 하는 포옹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때로 볼 키스에 대해 오버할 수도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드물지만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이 처음 그런 경험에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간주하여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렇다고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습관을 버린 지 벌써 수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