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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善惡)의 기준

수암11 2015. 8. 24. 09:18

 

선악(善惡)의 기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여러 복잡한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연기자들의 연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종국에는 ‘연기 참 잘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영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이면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연기자의 연기를 보고 있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너머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생활로 돌아와서 우리의 삶에 있어 가치관이나 선악의 진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예전에 나도 한 적이 있었다. 파스칼이 《빵세》에서 지적했듯이 피레네 산맥을 분수령으로 진리의 기준이 달라지고 자오선이 바뀐다고 해서 선악의 기준이 달라지는 현실 속에서 도덕이나 법률의 잣대가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문의 가르침을 주신 분께서는 상황이나 지리,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선악의 기준에 의문을 표하는 내게 그 기준을 ‘주변과의 조화‘ 라고 하셨다. 선악의 기준을 염두에 둘 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예의법률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비해서 훨씬 더 간결하면서 뚜렷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학인이나 도인의 기준은 이렇듯 다르다. 주변은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될 수 있고 사고를 확장하면 우주도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서로 간의 경쟁을 통해 상승⋅발전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모멘텀은 바로 자극인데 매너리즘은 최대의 적이다.

항상 질문에는 답이 포함되어 있다. 직접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은연중에 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매너리즘은 사람 간의 경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주지만 이를 잘 이용한다면 내적으로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언급했던 끊임없는 호흡 수련의 역할이 그것이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다는 '낙수천석(落水穿石)‘의 원리는 하찮은 물방울이 불가능한 결과를 이끌어내어 돌에 구멍을 낸다.

진리는 주변의 사소한 것에 있듯이 정말로 정성을 드려야 할 것은 사소한 것들이다.

석문호흡에서 단순히 호흡을 통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점을 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 주변의 극히 작은 것을 움직이다 보면 하늘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악을 논함에 있어서 예시로 든 인간의 변화와 관련된 모멘텀과 매너리즘은 패러독스(paradox)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는 이러한 패러독스가 도처에 혼재함을 인식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질문에 답이 있다.’

‘잔에 물을 채우기 위해 먼저 비워라.‘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비워라.’

‘유희를 이용하여 전투를 연습한다.’(《세종실록》7년 4월 19일)

장수에 집착하는 것이 장수의 최대 장애가 될 수 있다.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남겨 유명해진 말 가운데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


우주만물의 존재는 인력과 발산력이란 상반된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작용할 때 가능하다는 매우 모순된 결론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원리는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사고와 인식체계를 지배하는 원리이기도하다. 기억나는 몇 가지만을 예시로 들었지만 때로 이런 패러독스는 선악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가위에 눌리는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다. 사실 가위에 눌릴 경우에 누구나 당황에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온 몸을 통하여 경고음이 들리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쉬운 방법을 통해 해소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가위가 눌릴 때 오히려 긴장을 풀고 의수단전을 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는 것에 비해 훨씬 간결한 학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도통에 집착하는 것이 도통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