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결혼
조카의 결혼
지난 설에 시골에 명절을 쐬러 갔는데, 하나뿐인 큰 집 조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 중반에 결혼할 상대가 있다 하였다. 집에서 마뜩찮아 한다기에 마음에 들면 사고를 치라고 하니 안 그래도 그리 할 거라고 하였다. 사실 나이를 먹고 혼기를 놓치게 되면 결혼할 기회를 얻기 힘들게 되어 후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결혼을 찬성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일단 그 누구도 결혼을 도와주지 못하도록 형님과 형수님은 맏이이자 맏상주로서의 권리로 만인에게 통고하고 강제하였다.
사정을 보니 조카만 애타게 생겼다. 이미 오랫동안 사랑하면서 진행이 되어 모든 것이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 바 이미 나름 청첩장까지 인쇄를 해서 결혼일자가 목전에 다다른 것이었는데 부모의 반대가 결사적이었기에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부모로서 지니는 입장은 또 다르겠지만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그리 탐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우선 반대 이후에 파생될 수많은 문제점은 그 어떤 결정보다 파급력이 크다는 것이었는데 그 점은 간과되고 있었다.
조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집안으로서는 워낙 오랜만에 보는 아기여서 나는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돌봤다. 한창 놀기 좋아할 청춘이었지만 조카가 좋아서 띠에 매고 온 동네 뿐 아니라 다방이니 여기저기를 다 돌아 다녔다. 당시 생각에 나중에 내 아이를 가져도 이렇게 예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지중지 하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을 몸으로 실감한 때이다. 다방에서 친구들과 커피를 시키면 말 못하는 아기가 자신도 커피를 달라고 행동으로 요구하였는데, 요구르트를 주면 한사코 거부하여 불가분 커피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아이가 규칙적인 리듬에 쉽게 잠든다는 사실도 몸으로 겪었고 소리 내어 하는 어떤 표현도 아이에게는 알게 모르게 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아이와 온갖 일들을 해봤기에 나는 아직도 아기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러다가 헤어져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이었다.
결혼날짜는 다가오는데 집안에서는 그 누구도 참석을 못하게 하니 조카만 난감하게 되었는데, 나는 선뜻 혼주로서 참석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미 양쪽이 물러 설 수 없는 상황이어서 피해가 적은 쪽으로 생각되는 부분의 역할분담에 개입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혼주로서의 역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바였지만 조카의 주선과 가족들의 노력으로 예복도 빌려 결혼식 당일 안동으로 내려갔다. 본가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신랑의 부담이야말로 적지 않을 터인데 이런저런 작은 일까지 신경 쓰느라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신부 측에서도 일이 심상치 않기 돌아감을 깨닫고 결혼 전날 밤 늦게라도 혼주끼리 만났으면 하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래서 밤 12시가 넘어 안동에 도착하여 커피숍에서 안사돈과 신랑, 신부, 그리고 처남을 만났다. 우리야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모르니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는데, 안사돈의 당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근 조근한 어조가 조카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나름 유림의 고향 안동 지역에서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로서 단지 딸자식을 가진 부모라는 입장에서 아마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상심한 신부를 달래려 무심한 듯 나는 한 마디 거들었다. “시집에 신경을 쓰지 말고 시집살이를 하지 않으니 오히려 잘되었다.“ ”둘이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 예전에 관상에 관심이 있었던 내 눈에 신부는 시원시원하게 생겨 조카가 반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식에 신랑 측 일가친척은 일체 오지 않았다. 형님 내외가 워낙 심하게 단속을 해서 조카 둘이 왔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참석한 이종누님은 조카가 근무하는 직장을 통해 결혼 소식을 듣고 혼자 참석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사정을 듣고는 아연해 하였다.
결혼식과 폐백을 마쳤으나 과정에 상황을 파악한 사돈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으며 내내 굳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치러낸 결혼식에 수발을 든 아들래미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
챙겨주는 폐백은 모두 우리가 혼주를 대신하여 받았다. 그 양이 어마어마한데 놀라기도 했지만 하나하나가 직접 만든 것이어서 특히 그 정성에 놀랐다. 그 양과 질이 하도 놀라워서 사진을 찍어 두기 까지 했는데 먹으면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것은 마치 ‘딸자식을 가진 사람이 죄인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제물(祭物)을 언급할 때에 ‘정성은 귀신이 먹고 제물은 사람이 먹으니 귀신의 공덕이 사람에 미친다.’고 하는데, 폐백음식은 정성과 제물을 모두 얻게 되니 참으로 호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뿐 아니라 혼수도 이후에 더 보내 왔는데, 정성을 드린 음식이 분위기 상 제대로 전달이 기분이 아니어서 일부만 왔다는데도 그 양과 질이 놀라웠다.
신혼여행 후에 우리 집을 방문하여 인사를 하고 가기도 하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 휴일에는 인사차 한 번 더 방문하기로 약조하였으나 급작스러운 산통으로 인해 이루지 못하였다. 고명딸을 치운 사돈댁은 처와 자주 통화하면서 마치 아주 가까운 사돈인 양 소통을 이어갔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내 역할을 이어졌다. 출생신고를 위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처가 쪽에서 몇 개의 이름을 거론하기에 내가 결정을 했다. 보내온 남자아기의 사진은 조카가 어린 시절 모습과 판박이였다.
그 아기가 이제 백일이 되니 우리가 또 나서야 될 시점이 된 것이다. 조카를 통해 주왕산에 놀러 온 것을 안 조카며느리는 조카를 졸라 아이를 안고 밤에 숙소로 인사차 찾아왔다. 저녁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른 데에 귀한 철갑상어 회를 잔뜩 사가지고 왔기에 보관할 곳이 마뜩치 않아 조금만 남기고 돌려보냈다. 원래 내일 모레면 다시 백일상을 위해 안동을 내려 와야 하건만 일정상 도리 없이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사실 조카며느리의 애타는 정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백일상은 사돈댁인 처가에서 치러졌다. 음식은 모두 하나같이 인공조미료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시골 음식 맛이었으며 떡과 심지어 조각을 한 수박까지 사돈댁이 손수 작품을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편의성을 위해 그간 식당에서 행사를 치루지만 여기서는 모든 음식을 하나하나 직접 만드는 수작업을 통해 정성을 드리고 있었다. 좀 피곤했지만 모두에게 보람찬 일이었다.
아직 시부모와의 관계에 진전이 없어서 아쉬워하고 애태우기에 시집살이 하지 않으니 나는 그도 나쁘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고 달래 주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으니 언젠가는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리라 믿는다. 조카도 나름 아기를 이용해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터였다. 소통은 부모형제 간에도 쉽지 않다. 하지만 소통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고 다르기 때문에 소통과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소통은 다양한 각자의 색채를 드러내고 그 빛이 어우러져 일곱 빛깔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빛을 발할 때 비로소 조화의 힘이 드러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