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러
채널러
채널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해를 위해 부언을 하자면 일반적으로 채널러는 산자와 죽은 자를 소통하는 역할을 해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순히 망자 뿐 아니라 영적인 모든 존재(예를 들어 우주인이나 지신(地神)도 포함된다)와 능력이 있다면 심지어 신명까지도 실을 수 있다. 한당선생께서는 사람들의 공부를 위하여 학식이 가장 높은 소위 도서관장급의 고급신명을 직접 몸에 실어 사람들의 질문에 직접 답을 해준 적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질문을 해야 할 사람들의 수준이 낮아서 거의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으며 간신히 용기를 내어 물어본 한 도반의 질문에는 답할 가치가 없었다고 느끼셨음인지 대꾸가 없어서 더더욱 질문할 엄두를 못 내고 입을 다물었다.
한때 논란이 있었던 채널러와 관련된 내용으로 석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뜻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임을 미리 직감하고 채널러와 가장 가까운 자리인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집중하여 들었다. 당시 한당선생께서 의도한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모여든 제자들 가운데 소수가 사소한 명분을 빌미로 자리를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그 자리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혀 계획된 바가 없었으므로 그 누구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궁금한 점을 질문하라는 말씀에도 단 한 사람도 입을 떼지 못하였다. 무심코 마련한 자리에 그런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성인을 모실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워낙 자리가 엄숙해서 특히 심지가 약한 한 여성도반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난생 처음 겪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일을 예측해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거의 아마도 불교에 관한 지식도 부족하거니와 섣부른 질문으로 스승께 누를 끼칠까봐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마침 불교에 오랜 공부를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거북이 내단을 넣어 먹을 캔 맥주를 사러간 참이어서 동참하지 못하였다.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침묵을 지키고 있자 보다 못한 선생님께서 도반들을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그때의 질문 중에 하나가 “오늘의 불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없는 중생들이옵니다.”그리고 살아오면 이룬 공부 중에 공부에 도움이 되는 한 마디를 이야기 해보라고 언급하시니 다소 두루뭉술하게 “자신의 마음의 자신의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아마도 채널러가 제대로 전달을 하지 못한 듯하였다. 이후의 공부에 대해 대한 의향을 묻자 별 반향이 없었는데, 71세에 돌아 가셔서 그런지 새로운 공부에 대한 별 의욕이 없는 듯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의구심은 상황이 종료된 후 별도의 말씀이 있었지만 애써 채널러에게 내가 직접 확인을 한 느낌을 들은 바도 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에 대하여 경외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영적인 존재들은 일천계의 존재들로서 때로 인간들보다 더 순수하지 못하여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혼란을 주기도 한다. 신탁(神託)의 대부분이 그러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영적으로 뛰어난 채널러라 할지라도 뛰어난 성자나 신명들의 의사를 정확히 소화하고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의 상황에 대해 당시 참석하였던 몇몇 사람들의 후일담이 있었는데, 그토록 긴장을 하고 기억하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하지 않은 부분들은 채널러의 역할이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도인을 제외하고 뛰어난 일반적인 채널러는 정확한 단어 선택 뿐 아니라 분위기까지도 소화해서 전달하는데, 그 중의 인상적인 한 사람은 예전 분당지원에서 수련을 한 바도 있다.
한 가지 더 부언할 점은 소정의 수련 단계 이상의 분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은 일반인의 시각으로 볼 때 상상 이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것은 공부의 한 과정일 뿐이고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 더러 나아가 더 당면하게 해야 할 더 시급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되었지만 일월성법을 수련하는 아가씨가 삿된 기운들이 넘쳐나는 공간에서 결계를 치고 도반들을 보호한다는 것이 그러한 상황을 익히 아는 이들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일월성법 수련 단계가 그러할 진데 그 이상의 단계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부분에 있어 집중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소정 이상의 수련 단계가 되면 ‘심법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의미를 어렴풋 깨닫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하지 않는 것은 심법의 쓰임새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칼을 강도를 만났는데, 내가 총을 들고 있다 하더라도 그 총의 쓰임새를 모른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도 같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현실이고 사람들이 지니는 가치관이나 잣대와 학인들이 지니는 기준은 또 다른 것이다.
지구상에는 뛰어난 여러 선지자들이 이미 다녀갔다. 잠시 언급되었지만 오늘의 불교에 대해 석가의 대답이 “가이없는 중생”이라는 표현 속에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아무리 좋은 설법을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면 원래 의도한 바가 무색해지는 것이고, 특정 소수에 의해 종교정치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면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구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