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이해
‘인간에 있어 죽음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답을 알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답을 안다고 하는 이면에는 다른 복선, 예를 들어 종교정치적인 측면이 깔려 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명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얼마 되지 않은 과거 시절 여러 사례에서 예기치 못한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이라는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에게서 그리고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속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소년소녀 학도병까지 우리는 명분이라는 대명제에 대해 잠시 언급한 바 있었다.
우리 수련을 하는 학인(學人)에 있어서 죽음을 넘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 역시 바로 명분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도성구우, 조화선국이라면 한 인간의 목숨 이후의 세상이 분명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농업기반 사회로서 노동력이 절실했기에 대가족제도와 남아선호사상이 두드러진 부분이 없지 않은 면이 있었다. 남아선호사상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어린아이를 특히 예뻐하는 기질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 조선말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아이라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우리 민족성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고단한 삶을 이어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다른 민족에 비해 어린아이들을 특히 예뻐하고 사랑해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언젠가는 다가올 새날을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우리 수련을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서 나는 후생가외(後生可畏)를 깨닫는다. 주목할 만한 젊은이들이 눈에 띠는데 그들의 미래의 모습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 길을 나나 바로 주변 사람들이 걸어갈 수도 있다. 그 걷는 길을 앞서 간 사람들이 보냈던 따듯한 시선이 유사한 맥락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목되는 젊은이들에게 거는 기대는 우리보다 크다. 혹여 바로 내 주변에서 내 삶 이후 새로운 선지자(先知者)가 등장할 때 드러나지 않지만 과연 그 명분에 얼마만큼 충실했는가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도화재의 막연한 미래에 대해 채널러(channeler-영적 세계를 넘나들며 그곳의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을 의미)를 통해서 궁금한 점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언급된 바로 도화재의 부흥기는 2045년, 완전히 손을 떼도 절로 굴러 가는 시기는 2059년이라는 언질이 주어졌다. 물론 세상에 공개됨으로써 또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답답한 당시 그 언급된 시기만으로도 고무적이었다. 내가 살아 있는 당대에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혹 누릴 수 없더라도 지금 씨앗을 뿌리면 되는 것이고 그 수확은 결국 도문(세상)에서 거두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수련을 하는 학인은 긴 호흡을 지니고 세상사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내 삶에 있어 우리 도법이 존재하는 세계에 태어난 것 이상 큰 기쁨은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한 자체만으로 완성된 그리고 완성 될 존재이지만 그것은 구성원으로서 볼 때는 또 다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설혹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얼마만큼 가치기준을 가지고 노력하는가가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피할 수 없으며 비록 목표는 아니지만 한 생을 결짓는 것이어서 매우 다각적으로 의미 있는 해석에 대해 심지어 철학의 한 분야로서 까지 취급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에 대해 비유한다면 ‘빗방울이 다시 강으로 합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침 몸도 불편한 참에 생각이 나아가 가는 것도 또 다른 기회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