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향(茶香)
다향(茶香)
수련을 하는 학인(學人)은 차를 즐기고 진정한 차 맛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차를 즐길 줄 아는 것은 학인으로서의 품류이기도 하다.
차 사랑을 넘어 시나 서한을 통해 차 욕심 노골적으로 드러낸 인물로는 다산과 추사가 있다.
차를 이야기할 때 향(香), 색(色), 미(味)의 세 가지를 주로 말한다. 좀 더 내공이 있는 이들은 기운(氣運)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 사람들은 다향을 이야기 하지만 실제 다향을 잘 모르는 듯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다향이 코를 통해서 느끼는 감각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다향은 오직 차를 마시고 난 직후 목 넘김 뒤에 목에서부터 코 안으로 전해져 오는 그 향을 일컫는다. 진정 좋고 귀한 차는 그 향이 너무도 특별하여 정신이 쇄락해진다든가,
“찻잔 기울이니
속세의 찌든 때,
홀연히 흩어지누나!“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천석(1330∼?)의
“마른 창자를 축이어 속이 시원하고
침침한 눈이 열려 앞이 환하구나
차의 신기한 공 측량하기 어려워“
이도 그 맛을 다 드러내지 못하였다.
차를 읊은 많은 시 가운데, 다향(茶香)이란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좋은 차 한 잔을 마시면 삼킨 후에 그 향이 뱃속에서 번져 나와 목구멍 깊숙이 그리고 코 안 가득히 몇 시간을 넘어 심지어 다음날까지도 다향이 배여 정신이 맑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차를 쉽게 접할 수는 없다.
이 느낌 속에서는 비록 비린 고등어나 갈치를 먹는다 할지라도 몇 시간이고 그 향이 사라지지 않아 즐길 수 있다.
부언 설명을 위해 이 느낌과 유사한 맛에 대해 굳이 예를 들자면 제대로 된 구운 영광굴비를 씹어 삼키고 나면 이와 비슷하게 목 안 깊숙한 곳에서 감칠맛이 나는데 코로 거슬러 전해져 오는 그 향기가 이와 조금은 닮았거니와 이 감칠맛도 다향의 백분의 일에도 다가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고약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삭힌 홍어를 즐기는데, 삭힌 홍어의 뒷맛이 바로 개운한 때문이다. 그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것이 아니라 적절히 가미한 소금에 찍어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맛은 바로 제대로 된 발효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운으로 차 맛을 안다는 의미는 쉽지 않지만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차를 덖을 때 너무 센 불로 덖게 되면 화기(火氣)가 강해서 차를 머금을 때나 마시고 난 후에 입안에서 단내나 화기를 느낀다. 차를 너무 약한 불에 덖게 되면 차를 마시는 순간 비린내가 살짝 나기도 하며, 뜨거운 물에 너무 빨리 내게 되면 물 냄새가 섞여 나온다.
차를 덖을 때는 화기가 불가분 하므로 예전에는 그 화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백차(白茶)라 해서 차를 넣지 않은 찻물을 받아 마시기도 했다.
차에 기운을 넣게 되면 첫째, 기운이 들어간 찻물은 매우 부드러워지면서 단맛이 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 내용처럼 좋은 기운은 차 맛을 좌우하는 물맛을 바뀌어 놓는다. 지금도 채약단계에서는 공부를 위해 차에 채약을 넣어 맛을 보는 과정이 이지만 한때 도계 입문자들에 의해 귀한 약차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약차는 종류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신명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웬 귀한 약이 그리 많은지 하는 의문에 대해 그 약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 사용되어질 것들이라 하였다.
일반 수련자들이 차에 기운을 실을 때에 좀 더 효과를 보려면 수련이후가 좀 더 효과적이다. 여러 행공과 본 수련을 한 후에 기력과 심력을 키운 상태라면 심법을 거는 동시에 바로 그 반응을 자각할 수도 있고 예민한 사람은 그 순간을 감지할 수도 있다.
기운을 실을 때에는 사물 뿐 아니라 추상적인 대상을 실을 수도 있다. 해나 달 기운을 넣을 수도 있지만 ‘한줌 솔바람’을 넣을 수도 있다. 실체가 다소 막연한 한줌 솔바람의 맛은 어떠할까? 단맛이 강한 부드러운 맛일 수도 있고 솔 향이 물씬 날수도 있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맛이 다르다. 같은 차라도 팽주(차를 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차 맛은 확연히 달라진다. 기운의 역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미묘한 차이를 느끼려고 노력해 보는 것이 차를 마시는 학인(學人)들의 자세이다. 다만 위장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특히 반발효차는 자극적일 수 있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자제 하는 것이 좋다.
차를 너무 사랑하여 과다하게 장기간 상음한 사람들에게는 다벽증이라는 금단현상이 생겨날 만큼 중독성이 있다.
사람들은 다도(茶道)라 하여 복잡한 절차가 큰 의미가 있는 양 의미를 두려 한다.
차는 하늘에 제를 지낼 때 쓰이기도 하는 귀한 음식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정성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지나친 형식은 차의 본질과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예승즉리(禮勝卽離)는 예가 지나치면 멀어져 본질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다향과 미각
우리가 유독 숙성된 발효음식의 맛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이규태(1984)는 음성학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빨로 씹으면서 맛을 느낀다 한다.
우리 국어사전에서 전 어휘의 약 6분의 1이 목구멍 발성의 ‘ㄱ’자 어휘이다. 우리는 입술, 이빨, 혀, 목구멍 등 광역(廣域)의 미각을 동시에 동원시키지만 목구멍에 넘어갈 때 가장 농도 짙은맛을 느낀다. 서양말 계통에 치음(齒音)이 많고 우리 한국말에 목구멍에서 내는 자음이 많은 것도 이 미각을 느끼는 부위의 감각 발달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 광역의 미각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식품이 국수’라 하였다. 따끈한 칼국수의 맛은 씹을 때가 아닌 삼킬 때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자극하는 느끼는 맛이라 할 수 있다.
감치는 소리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생명은 나는 소리보다 그 소리가 끄는 나지 않는 여운의 오묘함에 있다 한다. 서양의 종소리는 타악성인데 한국의 종소리는 현악성이다. 한국 산사의 종소리는 마치 거문고 소리처럼 안개 속을 나선형으로 감돌며 무한 공간으로 사라져가기에 ‘나는 소리’보다 오히려 그 사라져가는 ‘나지 않는 소리’ 곧 여운에 묘미가 있다. 종을 치는 스님도 그 여운이 끝나는 시각을 영감으로 기다렸다가 치곤한다. 서양종처럼 물리적 소리로 치고 듣는 것이 아니다.
피리도 그렇다. 한국의 피리는 눈을 반쯤 감고 부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서 부는데 양피리인 플루트는 눈을 뜨고 분다. 악보도 봐야 하고 지휘자도 봐야 하기에 교통 신호나 교통 표지에 눈을 정신없이 돌려야 하는 운전사의 눈처럼 움직여야 한다.
플루트가 항상 도달하고 싶은 음도를 지향하고 있는데 대해, 피리는 그 소리에 잠입하여 그 여운이 지향하는 심도를 지향한다. 플루트는 그 구조가 개량되어 구멍이 뚜껑이 되는 등 복잡해졌지만, 한국 피리가 구멍 몇 개 뚫린 원시 그대로의 형태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악기의 소리를 물리적, 기능적으로 추구하는 유럽인의 귀에 비해 한국인의 귀는 마치 바람이나 물소리, 빗소리를 변경할 수 없는 것처럼 일단 맘에 와 닿는 어떤 울림소리를 얻으면 그로써 충족하는 정서 구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지고 보면 벌레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사람의 울음소리나 한숨소리 같은 자연음은 그 여운 때문인지 모음성의 소리다. 이 자연음을 녹음, 주파를 재어보면 한결 같이 저주파음인데 예외가 없다 한다. 음악 심리학자 시이쇼어가 조사한 바로 동양 사람이 자주파음 판단은 우수한데, 음의 고저나 멜로디 같은 고주파음에는 서양 사람에 뒤진다는 사실도 이 모음성 여운 민족의 한 증명이랄 수가 있겠다.
모음은 저주파인데 자음은 고주파이며 따라서 자연음은 저주파요 인공음은 고주파다.
감치는 맛이나 소리는 미각이나 청각의 영역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살짝 벗어나 있다.
모름지기 제대로 다향을 즐기자면 목 넘김 이후의 감각을 깨워야 할 것이다.
물론 좋은 차라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