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딸 2
2.
돌이켜 보면 첫딸아이 이후로 수양딸이 근 백 명가량 생겼다. 그 중 몇 딸 덕분에 나이든 수양아들도 댓명 얻었다.
지금에사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근간에는 감성적 소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전통적 가부장제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현대의 감성적 소통방식 하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며 부녀든 어떤 관계이든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한다면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이버 수양딸이 몇 있다. 한 번도 만나지도 얼굴도 모르지만 서로 코드가 맞아서 딸을 삼은 것이다.
사람으로서 전혀 궁금하지 않을 리야 없겠지만, 오히려 자제야말로 감성적 소통을 훨씬 원활케 해주며 더 깊은 신뢰를 통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 사람은 속성상 호기심으로 인해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성향이 대부분이지만, 오히려 자제함으로써 더 많이 숙고하게 되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한 수양딸은 이상한 계기로 여러 명이 만나 술을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다시 그 멤버가 음식점에서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럿이 자연스레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하다 보니 이전의 분위기가 선입견이었음이 드러나게 되고 자연 화제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즉석에서 의기투합하여 부녀관계를 맺었다.
독서를 좋아해서 늘 책을 지니고 있었는데, 항상 화제는 인생사와 사상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곤혹스러웠던 점은 혼자 만나기도 하고 여럿이 어울릴 때도 있었지만, 특정한 날, 즉 그중에 한 명이 생일날이면 마지막 코스는 춤추는 곳으로 끌려가 몇 사람을 다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별반 춤에 흥미가 없던 나는 그 특별한 날에 봉사를 다 감당해야 하였다.
수양딸로 인해 다소 당황스러운 경험도 있었다.
직장을 다니던 수양딸이 혼기가 차서 부모님의 권유로 고향인 청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처음 점심약속을 하게 되어 압구정동에 가게 되었는데, 키 큰 딸이 팔짱을 끼고 음식점을 찾는 도중에 친구와 동행한 처제를 만난 것이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처제에게 수양딸을 소개하였고 처제는 나를 믿었기에 별 이야기 없이 넘어갔다.
바깥에서 얻은 딸 자랑에 회사 다니던 여직원들이 회식 후에 항의를 했다.
“왜 바깥에서만 딸을 삼고 저희들은 내버려 두냐고?“ 하는 수없이 여직원 여섯 명을 그 자리에서 모두 딸을 삼았다. 그 이후로는 모든 여직원들의 어떤 허물도 나무란 적이 없으며 입에서는 덕담이 이어졌다.
그 중 한 딸아이가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놀러왔다.
둘이 물건을 사러 간다기에 간난아이를 내가 맡아 사무실 내방에서 한참 데리고 놀았다.
감성적 소통은 어린아이에게도 통하는가 보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다른 인연으로 맺은 딸아이가 아이를 데리고 오면 내가 맡아서 재웠는데, 그 엄마보다도 내가 더 아이를 잘보고 잘 재웠다.
다른 직장으로 이직 후에 회사동료가 전화가 왔다.
직장을 그만 둔 딸아이 하나가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서 큰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가정형편도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
이리저리 연관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여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특히 전 직장오너에게는 손으로 직접 간절하고 급박한 내용으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팩스로 보내고 혹시 전달이 안 될까 해서 아는 직원에게 전화를 하여 꼭 책상머리에 놔두도록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온 그 분이 백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보내왔다.
그 내용을 현 직장 오너에게 이야기를 하니 선뜻 백만 원을 기부한다.
딸아이가 한숨 돌리라고 우선 걷힌 돈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모은 돈은 따로 뒤에 보냈다.
주변 사람들이 적극 동참한 덕분에 칠백 여만 원의 돈을 보내어 그나마 한 숨을 돌렸다.
딸아이 하나는 지방에서 상경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참하니 주변에서 소개를 했는데, 남자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학벌에 인물도 괜찮다 보니 남자가 적극적인 구애를 했는데, 서울 풍물이 신기하기도 하고 순진한 딸아이는 내심 좋았는지 가끔씩 데이트 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결혼 전도 가끔 회식자리에 불러 자리를 같이 했는데, 아버지들의 눈에는 다 그렇듯이 조금 미흡했지만 그런 대로 0서방으로 부르며 수양아버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결혼식 날 전 직원이 동원되어 식장에 미리 갔는데, 문제는 주말이어서 부산서 출발한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예식시간이 다 되어가도 도착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간 우리는 당황하여 즉시 신부 측 접수를 시작하였다.
업무를 나누어 부조금을 받고 기록하고 계산기가 없어서 암산으로 합산을 하였다.
결혼식이 막 시작될 즈음에 부산서 출발한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우리는 확인된 돈과 봉투 그리고 방명록을 인수인계 하였다.
친부모가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수양아버지가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야 할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딸아이 부부와는 아직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고 있다.
이런 글을 쓴다는데 대해 한 번도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두 달 가량 전국현장을 다니면서 거의 외부와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나도 감성적이 되고 딸아이들과의 소중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볼까 하는 생각에 두서없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