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유격훈련에피소드(30년 전)1

수암11 2009. 5. 18. 10:32

유격훈련에피소드1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순환을 의미하며 적당한 발산이라는 것 또한 한편으로 순환의 계기가 되는 것이어서 천지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리라.

아들 덕에 군에 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빌미가 되어 이런 글도 써보고 발산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니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의미하는바 적지 않다.


지난해 모친상을 계기로 고향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화, 부친의 젊은 시절, 태평양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가던 동리사람들을 구하는 과정에 수배를 피해 만주로 피신 하셨던 행적, 6.25를 포함한 군 시절, 무공훈장과 관련된 일화 등을 주변에서 듣고 구체적인 내용을 부친께 직접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모친상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묻혀 지나갔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미군의 특수부대 신병훈련 과정에 시가전 모의훈련이 있었는데, 소상한 상황을 언급하지 않고 영화처럼 행동을 하라고 지시를 했더니 다들 일사분란하게 잘해내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예전에 비해 군기도 훨씬 부족하고 나약해 보이는 우리의 아들들이지만 비상시에는 영화나 대중매체를 많이 접한 아들들이 세계최고의 정예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근무한 70년대에는 유격훈련을 일 년에 두 번 받았는데, 군복무기간이 짧아지는 추세에다 조금 혜택을 받아 나는 다섯 번의 유격훈련을 받았다. 유격훈련이라면 상당히 어려운 훈련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워낙 훈련강도가 센 당시 보병 11사단 예하부대인 우리로서는 유격훈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소위 피크닉 가는 들뜬 심정이었다.

남면 시동에서 출발하는 행군거리는 다른 예하부대보다 훨씬 더 멀었지만, 평시 행군거리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인데다가 훈련일과가 끝난 저녁식사 후에는 거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시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시 자대생활에서는 일과 후에 기다리고 있는 저녁점호와 관련된 후속조치들로 인해 소위 매를 맞지 않으면 쉬이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사히 넘어 간다 싶으면 새벽에라도 사격장 한쪽 구석에 끌려 나가 매질당하기 일수였다.

그나마도 우리 선임들의 더 열악한 근무조건에 비해 한결 나아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으니 더 이전의 군생활은 마치 전설 따라 삼천리 마냥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삶처럼 들려졌다.

저녁 점호 시 내무반 청결 뿐 아니라 고참들의 점호 준비까지 챙기다 보면 워낙 이러저런 일에 정신이 없어 깜빡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는데, 가령 총기점호 시 노리쇠를 당겨 총구수입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노리쇠가 원위치되어 총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총구수입불량으로 푸쉬업을 500회 1,000회 실시하여야 하며 그 복창소리는 중대 막사 전체를 울려야 헸다. 한 선임병은 제법 큰 실수를 하여 매를 맞는데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매질 당한 엉덩이에 속옷이 피에 말라붙어서 가위로 잘라내어야 했다. 가슴은 겉으로 맞은 표가 잘 나지 않는 지라 가슴을 하도 맞아서 무거운 짐을 들지 못하는 병사들이 더러 있을 정도로 구타가 횡행했다. 점호가 워낙 빡세서 본인도 전역 전날 점호까지 받고 나올 정도였다. 물론 빠질 수도 있었지만, 삼년을 마냥 받은 점호를 빠지는 것도 우습다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얼차려는 사병 뿐 아니라 장교들도 에외가 아니었는데, 어떤 소대장은 부하사병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일주일 내내 근무시간을 완전군장에 연병장을 뺑뺑이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늘같은 소대장이 그런 얼차려를 받는 모습은 우리가 봐도 부끄러워 외면하곤 했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시간이 풍족한 유격훈련이 더 즐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종일 피티체조를 받기에 사정을 봐준 이유도 있거니와 고참이나 위에서도 유격훈련을 받음으로 인해 피곤하니 내버려둔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유격훈련이라 해도 코스훈련은 극히 짧은 시간에 통과하고 나머지 시간은 끝없는 피티체조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졸병들은 복창소리불량으로 인해 고참들에게 조금이나마 누가 될까하여 최대한 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얼마가지 않아서 목이 쉬지만 결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목소리에 쇳소리가 실리기 시작한다.

물론 아무리 힘들어도 동작은 쉬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종일 피티체조를 하는 판국이라 특히 쪼글뛰기를 반복하다 보면 관련동작근육에 최대한의 부하가 생겨서 제대로 동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도 생기지만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동작불량이나 복창불량의 지적을 많이 받은 경우에는 쉬는 동안 고참들의 가혹한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참들은 힘들다고 어영부영하는 졸병이 누구이고 특히 누구 때문에 더 가혹한 피티체조가 이어지고 있지 않는가 하고 유심히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졸병들에 있어서 심할 경우 코스 이동 시에 떨어져 한 쪽이라고 부러져 쉬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주차 유격 훈련이 끝나면 산언덕을 뜀박질해도 거의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 근력과 심폐기능이 강화 되었다.


일과 후에 분대별 천막 안에서는 여러 즐거움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점호나 그 준비가 상당히 생략되어 정신적인 여유로움 속에서 마음이 편안하다. 힘든 하루지만 산을 두 개 넘어 가면 저렴하면서 분대원들이 충분히 먹을 양의 닭백숙과 소주를 공급할 수 있으니 가는 발걸음은 자연 가벼운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고 엄한 제재를 받는 행위였지만, 11사 예하 최정예 전사들에게는 웬만한 감시의 눈길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다섯 번째 훈련 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부조교 신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대충 들은 이야기로 안전사고가 빈발해서 좀 더 안전에 유의한다는 명분인데, 어쨌든 피티체조를 하지 않고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니 얼마나 신이 났으랴! 장교건 병이건 올빼미복(훈련복)을 입으면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데, 약간의 동작이라도 굼뜨면 ‘동작봐라!’ 한마디면 더럽다는 표정과 마지못해 하는 이율배반적인 갈등 속에서 좀 더 진지한 체 시늉을 하는데, 그러면 챙이 긴 빨간모자를 쓴 조교들의 훈련강도가 유연해지는 것이었다. 하늘같은 장교들도 장교대우를 받지 못하고 똑같은 올빼미(유격훈련병)로서 병사들과 같이 유격훈련에 시달리니 그 정신적인 충격을 일과 후에 다만 휴식으로 때우려는 덕에 우리들은 심신의 피로도 잊고 마냥 신이 나는 것이었다.


한 번은 매우 더운 날씨 속에서 10km 구보를 하고 돌아왔는데, 저런! 조교들이 시원한 음료수로 환타를 마시는 것이었다. 먹을 물도 없는 판이라 더 갈증이 심했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휴가 뿐 아니라 그 후로도 한동안 환타매니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