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음식4) 장 담그는 날
(선도음식4) 장 담그는 날
글쓴이: 사천사 조회수 : 19 05.03.06 16:16 http://cafe.daum.net/Dohwaje/5Ax9/109
"한 집안의 음식 맛은 그 집의 장맛을 보면 안다."
햇살이 눈부시던 봄날 점심나절, 할머니는 물이 서말 들어간다는 장독 뚜껑을 열고 삼베 보자기로 한 번 더 둘러 씌워놓은 장독을 신주단지 들여다보듯 들여다보셨다. 검지손가락으로 붉은 고추랑 숯덩이를 제치고는 손가락으로 장을 찍어 혀끝에 대며 달착지근한 꿀맛을 보는 듯 입맛을 다시셨다.
"올 장은 참 달다. 햇볕이 좋아서 뚜껑을 열어 놓아야겠다."
간장이 달다고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입맛을 느끼지 못했던 어린 시절, 그래도 할머니의 흡족해하시던 표정이 좋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아침 일찍 학교를 가기 위해 서두르면 엄마는 설 뜸든 하얀 쌀밥에 계란을 넣고 귀한 왜간장에 참기름 한방울 떨어뜨려 뜨거운 기운을 식히고 밥을 비벼 주셨다. 아무리 아침 입맛이 없는 날이라도 뜨거운 쌀밥에 왜간장 넣고 날계란 넣은 비빔밥이면 술술 잘 넘어갔다.
그 왜간장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식용유를 짜고 난 탈지대두에다가 배양균주를 넣고 염산으로 가수분해하여 카라멜, 향신료, 방부제 등을 넣어 만든 가짜 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나서도 한참 후였다. 나 역시 우리아이들에게 왜간장 비빔밥의 추억을 먹이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으니 가끔 혼자 웃는다.
친정에 들려 간장을 한 통 얻어왔다. 나는 간장을 잘 담그지 못한다. 아파트에서 김치공장으로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간장을 못 먹게 만든 쓰린 기억이 있어 담그는 것을 포기 했었다. 대신 우리 집에서 2킬로미터만 나가면 한적한 시골에 접한 친정이 있으니 간장, 된장을 수시로 퍼온(?)다.
친정어머니는 요즘은 간장을 매년 담그지 않으니 간장독에서 햇볕에 간장이 자연스레 졸아들어 몹시 짜다고 하셨다.
나는 간장을 내 방식대로 다시 만든다. 그것으로 우리 집 간장 담그는 날로 대신한다.
멸치, 마른새우, 황태머리(이것은 사용하다 남은 것), 다시마, 물에 불린 쥐눈이콩과 무, 마늘을 넣고 푹 삶아낸다. 집 간장을 1/2 넣고 다시 푹 끓인다. 나물무침, 각종 국, 해초무침 등에 골고루 사용한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고도 음식 맛이 좋은 음식 솜씨 비결이다.
또한 위의 육수에 집 간장을 1/5 넣고 흑설탕을 넣어 푹 끓여 두었다가 조림간장으로 사용하면 좋다. 왜간장을 대신하여 음식의 감칠맛을 살린다.
조림간장은 냉장 보관해야 오래 먹을 수 있다. 생수병만 발견하면 핸드백이건 종이가방이건 간에 담아서 들고 온다. 살림밑천이 되니까.
간장은 시골의 자연 풍광 안에서 담가야 제 맛을 낸다는, 제대로 발효된다는 연구발표가 있었다. 자연 상태에서 발생된 음이온이 발효에 필요한 미생물을 제대로 키워낸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기로 산다. 여기서 말하는 生氣란 우리의 석문호흡 수령과정에 서 생기는 생기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부연한다. 계절마다 새롭게 자란 야채나 과일 그리고 곡식과 자연의 부산물들과 우리의 전통발효식품인 김치와 장류가 생기식품에 해당된다.
어릴 적, 우리 집 장독대는 부엌 샛문을 열고 나가면 땅바닥에 주춧돌이나 구들장으로 쓸만한 납작한 바위나 돌을 놓고 그 위에다 장독을 올려놓았다. 장독대 옆에는 아주 오래된 똘감나무가 한 그루 있어, 봄이면 감똘기가 눈꽃처럼 쌓였고 비바람 한번 몰아치고 난 여름에는 꼭지가 빠진 감이, 늦은 가을이면 노란 감잎이 낙엽 져서 쌓여있었다. 장독대 주위에는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자라고, 수세미 덩굴이 대나무로 세운 긴 장대를 타고 뻗어 오르고, 여나므 마리의 병아리가 암탉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우리의 전통 생활방식이 바로 과학이었던 셈이다.
우리 집 초가지붕이 스레트로 바뀌고,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는 사이에 우리 집 장독대의 추억도 옥상위로 올라갔다.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연례행사로 치르던 간장 담그던 손 없는 날이 언제인지도 까맣게 잊고 산다.
이제는 시골 어디쯤으로 삶터를 옮기고 싶다. 남편은 정년퇴직하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겠다면서 자연농하는 도반의 농장도 찾아다니고 작은 농토도 구입했다. 하지만 나는 농사짓는 일에는 자신이 없다. 다만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장독대를 만들고 간장, 된장, 고추장 만드는 일을 시작해보고 싶다. 마음 맞는 친구가 오면 내 친정어머니가 나에게 퍼주시듯, 한 오가리씩 퍼주는 여유가 생겼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