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관련

우리의 고대의 암각화

수암11 2006. 11. 16. 14:48

 

 

우리의 고대의 암각화 


2005/05/27 13:11


http://blog.naver.com/h7197/100013346688



남해도(南海島) 각석(刻石)
전(傳)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



 

 


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곳 금산에는 쌍홍문(雙虹門)이라는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석문(石門)을 앞에 두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면서 지금으로 부터 2200년 전(前)의 서불(徐市 또는 徐福)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금산사(錦山寺)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산사 옆 부소암 아래에는 7m x 4m의 평평한 바위가 놓여져있고, 그 바위 위에 1m x 50Cm의 넓이로 글자와도 비슷한 모양들이 새겨져있다. 일반적으로 암각화(岩刻畵)는 절벽이거나 세워진 바위 면에 있는데, 이것은 얼핏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산비탈에 박혀있는 나즈막하고 아주 평범한 바위 상부(上部)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 마치 종이에 글을 쓴 것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상형문자(象形文字)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암각화(岩刻畵)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곳 남해도 인근에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傳說)이 이곳저곳에 전해져 오기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 정(政)이 보낸 사신(使臣) 서불(徐市)이 이 곳에서 불노초(不老草)를 찾으면서 새기어논 글자라 하여, 과거에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意味)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1)


 

암각(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2)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3) 또한 "일본(日本)의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다고 한다. . . . 서복(徐福)은 일명 서불(徐市)로서, 불(市)과 복(福)의 음(音)을 같이 혼용(混用)하고 있다."(4)

서불(徐市) 또는 서복(徐福)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때, 낭야(琅邪) 사람으로 연단술(煉丹術)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하겠다는 뜻을 굳힌 방사(方士)의 한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 정(政, cheng)이 B.C. 221년(始皇 26年)에 6국을 정복(征服)하여 대륙(大陸)을 통일(統一)한 뒤, 천하(天下)의 부호(富豪) 120000호(戶)를 함양(咸陽, xianyang, 현재의 西安, xian)으로 이주(移住)시켰으며, 죄수(罪囚, 刑徒) 700000명을 동원하여 함양(咸陽) 북판산(北阪山)에 아방궁(阿房宮)을 짓게 하였다. 3년후 B.C. 218년에 천하(天下)의 명산(名山)마다 자신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러 다니던 진시황(秦始皇)이 낭야(琅邪)에 왔을 때,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神仙)이 사시는데, 어린 소년(少年), 소녀(少女)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려 합니다." 시황(始皇)은 크게 기뻐하며 총각 처녀 3000명을 가려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아가서 신선(神仙)을 찾아오게 하였다 한다.(5) 그러나 태백일사(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에서는 약간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도 역시 회사(淮泗)지방 출신이라 평소에 진(秦)나라를 거역(拒逆)할 뜻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바다로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주(逃走)를 계속(繼續)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6) 여하튼 이때 서불(徐市)은 동야현(東冶縣)의 해상(海上)에서 곧 나패(那覇)에 도착하고, 다네시마(種島)를 거쳐,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곳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으며, 이국(伊國, 伊勢)의 신궁(神宮)에는 서불(徐市)의 무덤(墓)과 사당(祠堂)이 있었다고 한다. (7) 즉 이러한 기록(記錄)에서는 서불(徐市)이 지금의 남해도(南海島)에 도착했었다고 명시(明示)되지 않았으나, 남해도(南海島) 내의 여러 곳에 서불(徐市)의 전설(傳說)이 남아있어, 서불이 분명 이곳을 거쳐 갔으리라 생각된다. 오히려 기록으로 보기에는 여기의 암각(岩刻)을 주로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전각(篆刻)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서불(徐市)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지 않나 생각된다.


선(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 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禮)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王)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旗)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8)

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로서는 신시(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발해(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倭)와 진(辰)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金+契'木)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 즉 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秦,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晋,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9)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秦)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열거(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10) 그리고 우서(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11)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卦)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12) 여기서도 효(爻)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秦)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13)


부분의 고문자(古文字)들도 대부분 가로나 세로로 나열(羅列)되거나, 줄칸을 그어서 그 안에 채워 넣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남해도(南海島)에서 볼 수 있는 형식과는 구별(區別)이 된다. 특히 기념(記念)으로 새겨놓는 암각(岩刻)은 주로 암벽(岩壁)이나 비석(碑石)일 경우가 많다. 암각(岩刻) 비석(碑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암(李'品/山', A.D. 1296~1364)이 편찬(編纂)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B.C. 1833년 여름 4월, "황제(皇帝)께서 나라를 순시(巡視)하시다가 요하(遼河)의 왼쪽 강가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帝王)의 이름과 호(號)를 새기어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뛰어난 금석문(金石文)이다." (14) B.C. 1634년, "황제께서 태백산(太白山)에 올라가서, 비석(碑石)을 세우고 여러 성인(聖人)들과 임금들의 공덕(功德)을 새겼다." (15) 이 기록에서도 기념비(記念碑)는 비석(碑石)을 만들어 세우는 것이며, 다른 기록에서도 최소한 절벽(絶壁)에 암각(岩刻)하여 남기고 있다. 이 암각(岩刻)이 새겨진 위치(位置)가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절벽(絶壁)이 아니고, 금산(錦山)에서 내리뻗은 능선(稜線)에서 돌출(突出)되어 드러난 바위 위라는 점에서 오히려 풍수(風水)에서 말하는 기혈(氣穴)과 관계있는 장소(場所)이자, 하늘을 지향(志向)하여 만들어진 유적(遺蹟)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제천(祭天)이나 제의(祭儀)의 성격을 갖고있는 경북(慶北)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한들바위(또는 신선바위)의 암각화(岩刻畵)들과 성격상 상통(相通)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종합(綜合)하여 보면, 여기 남해도(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線)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암각(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天)' 자(字)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주민(住民)이 전하나 직접 찾아보지는 못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나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른다.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이라고는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암석(岩石)의 자연적(自然的)인 균열(龜裂)이 아닌가 생각된다.

(邊光賢작성, 1988년 7월 촬영, 1997년 1월 작성, 1998년 3월 수정, 보완)


(1) 과거부터 전해지는 여러 기록에서의 서불(徐市)을 '서시'로 읽어왔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생활속의 한자' 433호에 보면, 서시에 대한 김언종(金彦鍾) 씨의 매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이글에서 김언종은 서복(徐福)도 아니며, 徐市로서 '앞치마 불'인 '서불'이라 읽어야 올바른 발음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호칭이야 어찌되었든 앞으로는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모두 '서불'로 하였다.
(2) "南海縣郎河里岩壁 有神市古刻" (太白逸史/ 神誌秘詞),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崔致遠嘗得神誌古碑 . . . 卽郎河里 岩刻的是皆實跡也" (太白逸史/ 三聖記 註).
(3) "聞 南海島 郎河里之溪谷 及 鏡珀湖 先春嶺與 夫烏蘇里 以外岩石之間 時或有發見 彫刻非梵非篆 人莫能曉"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리고 남해도 낭하리(郎河里)는 이 암각 소재 지역의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며, 경박호(鏡珀湖)는 현재 만주(滿洲) 연변(延邊, yanben) 북쪽, 흑룡강성(黑龍江省, heilongjiang)의 모란강(牧丹江) 상류(上流)에 위치하고 있다.
(4) "日本紀伊 有徐市題名之刻 伊國神宮 有徐市墓祠 云徐福一稱徐市 市福音混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기이(紀伊)는 지금의 일본(日本) 혼슈(本州, honshu)의 와가야마(和歌山, wakayama)縣이다.
(5)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146쪽 및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한 金彦鍾의 '생활속의 한자'(朝鮮日報 連載) 433호 참조.
(6) "至於徐福韓終 亦以淮泗之産 素有叛秦之志 至是入海求仙 爲言仍逃不歸"
회사(淮泗) 지방은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省, henan) 신양(信陽, xinyang) 지역으로 추정(推定)된다.
(7) "秦時徐市自 東冶海上直 至那覇經種島 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舊有 徐福墓祠 或曰亶州 徐福所居云"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그리고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참조.
나패(那覇)는 일본 규우슈(九州) 남쪽 난세이 제도에 딸린 오끼나와 섬 남단에 있다고 함. (임승국 번역, '桓檀古記', 정신세계사, 1987. 268쪽 참조)
(8) 황용훈,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민음사, 1987. 91~92쪽 참조. 그리고 정인보의 해석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다음 구절(句節)을 참고(參考)한 듯이 보인다.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9) 檀君世紀/ 蘇塗經典本訓에 소개된 三聖記 註釋 參考
그리고 숙신(肅愼)의 원음(原音)은 조선(朝鮮)이라 하며, 진(秦) 이전에는 동이족(東夷族)이 중국 대륙을 대부분 점유(占有)하였으나, 같은 동이족(東夷族) 출신(出身)인 진시황(秦始皇) 정(政)에게 패한 후, 여러 나라 왕족(王族)과 귀족(貴族) 대부분이 한반도(韓半島)와 일본(日本)으로 이주(移住)하여 피신(避身)하였다는 주장(主張)이 있다.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참조)
또한 진(秦) 시대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던 흉노족(匈奴族, Hun)는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동이(東夷), 북융(北戎), 동호(東胡), 예맥조선(濊貊朝鮮)과 부여(夫餘)와 숙신씨(肅愼氏)를 포함(包含)하여 통칭(統稱)하는 말로서, 대륙(大陸)에 퍼져있던 기존(旣存)의 여러 환족(桓族, Hwan)을 비하(卑下)하여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동중(元董仲)이 편찬(編纂)한 삼성기(三聖記全/ 下篇)에 보면 구약성경(舊約聖經)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인류의 조상(祖上)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아이사타(阿耳斯타)에서 처음 만나 천신(天神)의 가르침으로 결혼(結婚)하였으며, 그 후손(後孫)이 구환족(九桓族)이 되었다고 한다.
"人類之祖 曰 那般初與阿曼 相遇之處 曰 阿耳斯(駝-馬) 夢得天神之敎 而自成昏禮 則 九桓之族 皆其後也"
(10) 클로드 보데(Claude Baudez)/ 시드네이 피카소(Sidney Picasso), 김미선 옮김, '마야-잃어버린 도시들', 시공사, 1996. 참조
(11) "留記云 神劃曾在 太白山靑岩之壁 其形如ㄱ 世稱神誌仙人所傳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留記)
(12) 金東春, '天符經과 檀君史話', 가나출판사, 1987. 259~289쪽 참조
(13) 神代文字總覽 參考, 웹페이지 http://www.sannet.ne.jp/userpage/tsuzuki/sinmoji.htm (97-10-26)
(14) "帝巡國中 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 刻歷代帝王 名號而傳 之是金石之最也" (檀君世紀/ 12世檀君 阿漢 在位52年)
(15) "帝登太白山 立碑刻列聖群汗之功" (檀君世紀/ 15世檀君 代音 在位51年)

 

 함안 도항리 암각화 (咸安 道項里 岩刻畵)

 


 

해안 천혜(天惠)의 고항(古港) 마산(馬山)과 인접하고있는 함안 (가야; 伽倻)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발 백여미터 이하의 나즈막한 구릉 위에 50여기의 중형, 대형의 봉토분이 줄지어 축조되어 있다. 이곳 함안(가야)은 아라가야(Ara Kaya)의 수도로서 알려지고 있는데, 1917년 이곳에서 가장 커다란 봉분인 제4호분을 발굴하여 그 내부구조를 알게되었다. "당시 조사된 내용을 보면 장방형으로 네벽을 쌓아 돌방을 만들고, 위에서 관을 내려 놓고 뚜껑을 여러 개의 판석을 잇대어 놓고, 그 위에 흙을 올려 봉토를 만든 이른바 수혈식 석실분 (竪穴式 石室墳)임이 밝혀지게 되어 이 일대의 대형고분 역시 같은 형식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

선을 따라 봉긋봉긋 솟아있는 고분들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크게 구분하여 보면 남북으로 뻗은 주 구릉의 대형 봉분들과 이 구릉에 연결되어 서편으로 뻗은 작은 구릉 위의 중형 봉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전체를 조감(鳥瞰)하면 마치 거대한 용(龍)이 서쪽으로 다리를 뻗고 드러누어있는 형국(形局)이고, 각 구릉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고분들은 그 용의 혈맥(血脈)을 표시한 것 같이 보인다. (2) 또한 2, 3호분의 경우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그 주변이 3단의 토단을 형성하고 있어 이곳의 머리와도 같은 매우 별다른 느낌이 주어지는 곳이다. 단순히 구릉 위에 봉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형태의 구릉 이곳저곳을 볼록하게 만들어서 마치 동물의 관절과도 같은 모양으로 인하여 지형에 힘이 들어있고 또한 주능선의 봉분들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연결이 척추뼈와 같아 보인다.

이러한 양식의 무덤 배치는 봉분의 외관에서 뿐만 아니라 주봉과 연결하여 산맥의 형세를 기본으로 무덤을 조성하였기에 현재의 한반도 묘지 풍수(陰宅風水) 사상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풍수사상이 결코 중국에서 비롯된 것 만이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남부의 가야 풍습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생각되는 현장이다. (3) 이곳과 비슷한 상황은 여기보다 이전에 축조되었을 창녕 유리 고인돌 인근에서도 뚜렸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계성고분군에서 이와 비슷한 양식의 봉토분을 볼 수 있다. (4) 이곳의 대형 봉분들은 대략 AD 5세기 이전의 아라가야의 지배계층 무덤들로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라가야 고분군의 가장 남쪽에도 4기의 중소형 고분이 줄지어 있는데, 그 서쪽 끄트머리 고분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가로로 누어있으며, 그 표면에 동심원과 성혈이 새겨져 있다. 수많은 성혈과 동심원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히 새겨져 있어 하늘의 별들을 표현하였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5) 함안 읍네에서 의창군으로 향하는 1035번 국도에서 파수 농공단지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접어 들어 도동으로 가다보면 왼쪽 산자락 끄트머리에서 이 바위를 찾을 수 있으며 이곳의 행정지명은 경상남도 함안읍 도항리에 속한다. 바위 면은 서쪽 265도를 향하고 있는데, 건너편 멀지 않아 마주 보이는 능선은 단조로이 남북으로 뻗어있으며, 그 아래 하천이 산줄기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남강(南江)을 거쳐 남지(南旨)에서 낙동강과 합류하게 된다. 이 바위의 크기는 약 1.1m x 2.5m x 50Cm의 니암(泥岩) 종류로서 인근 능선이나 주변에서 볼 수있는 풍화된 암반과는 그 질과 결이 약간 다르고 게다가 이곳 주변 능선에서는 이러한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전혀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인돌 또한 전혀 볼 수 없으며, 이 암각화 또한 이 지역에서 유일한 것으로, 위치와 규모면으로 고인돌 개석(蓋石)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으나 여러가지의 정황으로 보아 고인돌 개석으로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 바위는 산자락 끝에 위치하는데, 애초에 고인돌이 세워져 있었을 경우, 봉분 축조자들이 이 바위가 필요치 않을 경우 다른 곳으로 쉽사리 옮길 수 있으며 반대로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갖고와서 간단하게 올릴 수 있는 매우 낮은 언덕이고, 바위가 연질(軟質)인데다 판석으로 절리되는 점판암이어서 얼마든지 조각으로 깨트려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애초의 고인돌 개석을 이 곳으로 옮겨 암각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여하튼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비스듬히 기운 현재의 상황이 봉분과 바위가 동시에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되는 위치이며, 그만큼 현대의 비석과도 흡사한 기능으로서, 봉분을 위한 장식적인 석물(石物)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게다가 영일 지역에서처럼 고인돌 앞에 분묘를 조성하거나 경주 상신리 경우처럼 고인돌 주변에 분묘를 조성하기는 하여도 고인돌 바로 뒤에 분묘를 조성하는 경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6)

 

위 전면에 골고루 새겨져 있는 성혈이 측면과 아랫면에서는 없고 꼭대기 윗면에서는 볼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현재의 상황이 성혈이 제작되는 시기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오른쪽 부분이 파괴되어 잘라지고 중간 부분의 판면이 유실되어 원래의 전체 모습을 알 수는 없으나 현재 잔존하는 바위의 형태로 보아 앞면이 길죽한 타원형의 면을 보유하고 있는 바위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표면의 풍화 정도는 탁본(拓本)을 통하여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는데, 현재의 하부면이 상부면에 비하여 좀더 풍화되었으며, 60Cm 너비 이하로 유실된 중간부분은 다른 면에 비하여 훨씬 풍화 정도가 덜하였다. 상부에서 볼 수 있는 성혈과 상부면이 하부면에 비하여 풍화가 덜되었다는것은 애초에 좀더 반반한 면을 위로 하여 지금처럼 가로로 설치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바위가 선돌로서 수직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유실된 중간 부분에서 성혈이나 홈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절개된 면이 바위결과는 달리 방사형으로 주름져 있는 점으로 보아 자연적인 절리(節理) 현상으로 판면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힘에 의하여 중간 부분의 판석이 절개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를 정점으로 하여 3단의 타원형이 반복된 것처럼 층을 이루고 있으며, 한번 쪼아서 만들어진 조그만 단일 홈들이 전면(全面)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흔적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도 확인된다. 이 조그만 홈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바위구멍(성혈; 性穴)들과 중심이 성혈인 겹동그라미, 그리고 날카로운 직선들이 새겨져 있다. 대부분 뽀족한 도구로 쪼아파기하였으며, 간혹 성혈 중에서 둔기(鈍器)를 사용하여 다듬은 듯이 홈 내부와 오른쪽 아래 직선이 반구형으로 파여져 있다. 성혈을 중심으로 새겨진 겹동그라미는 육안으로 모두 6개가 확인되나 탁본을 통하여 2-3개 정도의 성혈 주변에 겹동그라미가 얕게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왼쪽 판면과 오른쪽 아래 판면의 아래 부분에 방사형으로 모두 5개의 직선이 새겨져 있으며 왼쪽 면에서는 난잡한 직선, 그리고 그 윗부분에서 다섯개의 수직선과 맞닿은 아래 수평선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7)

전면에 얕게 깔린 홈과 함께 수없이 산재되어 있는 바위구멍들은 개중에 다시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것도 있으나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우연성이 강한 상황이며, 마찬가지로 바위구멍들이 이루어진 것도 판 전면을 골고루 쪼으다가 그 중 두드러지게 파여진 부분을 집중적으로 쪼은 듯이 매우 불규칙적이며, 그 폭과 깊이 또한 엄지손가락을 쌀짝 담글 정도에서 약간의 편차를 보이고 있다. 여기 암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겹동그라미들은 그 중심이 완전한 성혈로서 반구형으로 파여져 있다. 성혈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원을 새겼는데, 우선 가운데 성혈을 파고 그 다음에 차츰 외원을 등간격으로 반복하여 새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부분 원각의 굵기와 깊이가 일정하지만 가장 크고 확실하게 보이는 중앙 부분의 여섯겹동그라미에서는 외곽으로 갈수록 차츰 굵기를 더하고 있다. 또한 새겨진 겹동그라미 내에 잔존하는 성혈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애당초 드문드문 성혈과 직선을 새겼으며, 나중에 겹동그라미를 새기고 그 후에 겹동그라미와 직선을 피하여 전면적으로 성혈들이 새겨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여하튼 겹동그라미과 직선들 대부분이 성혈과 겹치지 않게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 결국 여기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겹동그라미와 직선인 셈이다.

 

 

위 오른쪽에 모여있는 4개의 겹동그라미는 겹동그라미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사례이다. 여기 암각의 제작자가 어떤 의도로 한군데에 각기 다른 동심원을 새겼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한겹동그라미 이외에는 겹이 다른 동심원을 제작하여 각 동심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개별적으로 구별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 화면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작업할 때, 각자의 개성 차이로 약간씩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또한 상징 대상이 구분될 수 있을 때, 단일 제작자에 의하여 기존 모양을 약간씩 변형시켜 각 이미지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각기 다른 4개의 동심원은 최소한 각자의 상징 대상이 다르며, 또한 형태의 차별로 인해 그 상징 대상 또한 신분이나 계급과 같은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였으며, 이 암각의 의미가 별자리이든 그 무엇이든 여기서는 차별되고 등급화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 형태의 구별을 통하여 최고의 형태와 그 이하의 형태로서 이미지 형성의 단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 네개의 겹동그라미들은 각기 원의 숫자는 다르나 중심은 거의 동일한 크기의 바위구멍을 보여주기에 우선 같은 크기의 바위구멍이 제작되고 그후 외원들이 새겨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A와 D의 겹동그라미가 외곽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원의 숫자가 6겹과 5겹으로 차이를 두고 있고 A에서는 외곽원의 굵기가 두꺼워져 D보다 좀더 완전한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한겹으로 외원을 새긴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어 우선 한겹으로 시작하여 차츰 4겹 이상으로 계속 반복하여 쪼아새긴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고로 외곽의 원은 중간 원이 찌그러진 상태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 4개의 겹동그라미를 제작 순서대로 나열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형태의 완성도로 동심원의 제작과정을 구분하여 순서를 매겨보면, C-B-D-A의 순으로서 정해진 크기의 구멍에서 차츰 주변으로 확산되는 모양을 새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순서로 각기 동심원의 중요도가 다르고, 개별적으로 구별된 이미지로 인하여 각 동심원은 신분과 계급이나 나이가 다른 인간 사회의 구분을 형태로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점(圓點)에서 확산되는 원 또는 겹겹이 둘러싸인 동그라미,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이 자연(自然)과 생물의 습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모든 이미지의 출발점은 곧 자연이기에 여기의 겹동그라미 또한 자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다. 수많은 자연 대상물 가운데 이러한 모습과 가장 유사한 것은 우선 수면(水面)에서 쉽게 확인된다. 조용한 수면 위에 돌이 떨어졌을 때 사방으로 퍼져 가는 파문(波紋)은 어떤 작용의 시원(始原)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자연적 형태이다. 또한 단단한 껍질로 둘러싼 알(卵), 그리고 여자의 자궁(子宮)등이 겹동그라미의 형태적 의미와 일치하고 있다.

북미 대륙에서 발견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암각화 가운데 구상적 형태와 함께 하는 소용돌이 무늬나 동심원은 때로는 태양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주로 샘이나 출발지, 탄생, 변화 등의 의미로서 읽혀진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 섬에도 여기와 비슷하지만 성혈이 없는 동심원의 암각화가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출산 후 자식의 건강을 바라는 기원 장소로서 알려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말해주는 것은 동그라미의 형태 자체가 갖고있는 방어와 보호의 성격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든 생물의 기원을 자궁이나 알로 생각하고 악마를 막아주는 신성한 장소이자 보금자리이고 생명의 탄생지로서의 동심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고대에는 원은 알 모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에서 탄생한 새와 뱀들이 신(神)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알에서 탄생한 인간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는 우리의 고대 난생 신화(卵生神話)에서 알 수 있듯이 알은 곧 신성한 존재로서 다루어지고 그 존귀한 "알"을 얻으므로서 그 부족의 안녕(安寧)과 발전을 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기 암각에서의 바위구멍은 바로 신성한 "알"을 얻기위한 기원이었고 그것이 생산(生産)이나 다산(多産)을 바라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동심원은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듯이 이 "알"의 힘이 주변으로 확산되기 바라는 의도에서 이런 형태가 출발되었으며 바위구멍(성혈)의 제작은 다산(多産)의 상징적 기원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런 점에서 보면 둥그런 원추나 반구 형태의 봉토분은 바로 "알"에서 태어난 인간을 태어난 곳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회귀적 의도와 악마 퇴치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옹관묘의 독항아리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만큼 이곳 아라가야의 "아라"의 어원 또한 "알"과 같은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타당하리라 싶다. 말산리(末山里)와 도항리에 산재하고 있는 고분들, 즉 주능선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뻗은 소능선에 둥그런 봉분을 배치한 이유는 바로 봉분의 주인공이 산과 같이 영원하게 위력을 발휘하기를 바라고 그와 더불어 부족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고 줄줄이 이어지는 봉분들은 곧 아라가야의 계보(系譜)로서 이를 과시하고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1997년 9월 사진 촬영, 1997년 9월 작성, 10월 보충)


(1)현지 아라공원내 안내판 인용
(2)풍수용어로 용(龍)은 산(山)을 가르킨다. 산의 지세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기복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용이라 일컬으며, 그 용의 신체인 산줄기를 인체나 생물학적 관념으로 파악하여, 생기(生氣)가 모일 만한 장소를 침구학(鍼灸學) 용어인 혈(穴)이나 맥(脈) 이라고 말한다.
또한 함안의 지형을 우리의 풍수(風水)에서는 봉황이 날아가는 비봉형 (飛鳳形)으로 해석하여, "16세기에 군수 정한강(鄭寒岡)이 읍자리에 봉의 알모양으로 흙을 쌓고 군 동북쪽에 벽오동 천 그루를 심어 대동숲(大桐藪)이라 일렀다. 또 대산리(大山里)에 봉의 먹이가 될 대숲을 일구어서 봉이 영원히 떠나지 않도록 하였다. " 한다. (김광언, "풍수지리", 대원사, 1995. 67쪽)
(3)최창조(崔昌祚)는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서해문집, 1992. 66,82쪽)에서 우리의 풍수사상이 중국과 다르며 중국의 두가지의 경향과 우리의 것이 혼합되어 형성되었다고 한다. 즉, 북쪽으로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온 좌향(坐向) 중시의 방위법(方位法)과 남으로 유입된 지형과 지세를 중시하는 형세법(形勢法)이라 칭하는 강서법(江西法)이 통일신라 이전에 한국의 자생적 풍수와 접목되었다고 한다. 풍수사상이 매장풍습과 관련이 있는 만큼 이 점에 대하여는 좀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며 단순한 전파와 흐름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많은 것으로 안다. 오히려 그의 다음말이 무게를 갖고있다.
"중국 풍수가 산보다 물을 중시하는데 대하여 우리는 산을 더 중히 여기며, 중국이 인공 건조물의 영향력을 과대 평가하는데 비하여 우리는 오히려 자연의 형세를 더욱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형국론(形局論)의 소응적(所應的)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
(4)고대의 대형 봉토분이 구릉이나 산에 조성된 이유는 대형 홍수등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되며, 시일이 지나면서 구릉 자체의 지형과 주변 환경에 의미를 부여하였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의 고분군 가운데 이 아라가야의 고분군이 지형과 가장 밀접한 배치를 보여준다.
(5)일반적으로 동심원은 북방에서 도래한 천신족(天神族)의 작품으로 태양을 상징하며 풍요를 기원한다고 여기고 있으며, 토착민에 대한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부족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의 암각화", 한길사, 1996. 153쪽)
(6)아일랜드의 뉴그란지(New Grange)에는 이와 비슷한 모양과 크기로 봉분 입구를 막는 형식으로 봉분 둘레에 빙둘러 세워진 암각 바위들이 있다. 여기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지만 봉분의 크기는 여기와 비교가 안되는 초대형 석실 봉분이고, 입구는 개방되어 있다.
(7)여러 사람이 탄 배 형상으로서 "하늘나라(저승)로 영혼을 띄워보내는 혼선(魂船)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장명수, 한국 암각화의 편년, "한국의 암각화", 한길사, 1996. 205쪽)

 

 암각화를 탁본하는 방법
(岩刻畵 拓本 方法)


(이 내용은 필자의 저서, '고인돌과 거석문화'에 들어있습니다)

 

 

통 탁본(拓本)(1)은 오래된 비석(碑石)의 글씨나 그림을 모사(模寫)하거나 서체(書體)를 연구하기 위하여 그 비석에 새겨진 형상을 종이에 있는 그대로 옮기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실로 문자를 비석에 새기기 시작한 이후 탁본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탁본의 역사도 장구(長久)하다 할 수 있다. 특히 암각화 탁본은 그 대상이 절벽이나 세워진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고 넝쿨과 이끼에 의하여 뒤덮혀진채 오랜 풍상(風霜)을 견디어온 것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그 표면이 매우 거칠고 심한 균열이 생겼으며, 자연적인 풍화작용에 의하여 새겨진 형태가 육안(肉眼)으로 확인하기 힘든 것도 있어 이를 제대로 채탁(採拓)하기에는 일반적인 비석보다 어려운 점이 많다. 채탁의 방법은 요철(凹凸)의 윤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전통적인 목판 인쇄나 금속활자 인쇄 방법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으나 채탁하고자 하는 대상물에 먹을 칠하지 않는다는 점이 일반 목판과 크게 구별되는 것이다.

탁본의 기본적인 방법은 주로 炳震 스님의 '탁본(拓本)의 세계(世界)' (一志社, 1991)를 참고하였다. 스님은 주로 표면이 반반한 비석(碑石)이나 목판(木板)을 탁본(拓本)하는 방법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으나, 이를 응용하면 암각화에 적합한 탁본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스님이 소개한 '먹방망이'는 쌀 또는 좁쌀을 왕겨와 함께 순면(純綿)이나 비단(緋緞)에 싸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여러 종류의 '먹방망이'를 사용하게 되면 다양한 표면 질감을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도구이다. (2)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목판(木版)에서 이용해온 여러 도구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무엇보다 다양한 깊이로 음각(陰刻)된 암면(岩面)을 보다 예술적으로 채탁하는 데에 전혀 손색이 없으며, 면을 찍기에 적합한 '바렌'의 장점을 살린 매우 독창적(獨創的)인 도구이다. 아래에 적어논 '뭉치'(3)의 제작방법은 스님의 '먹방망이'를 응용한 것으로 현지(現地) 탁본 작업을 통하여 나름대로 개발시킨 것이다.

傳統的인 木版

국의 전통 목판의 경우에서는 목판 위에 '먹솔'로 먹을 칠하고 종이(韓紙)를 덮은 다음 털뭉치인 '인체' 또는 '마렵'으로 문질러서 찍어내었다. 먹솔은 짚이삭이나 갈대 또는 수수의 부드러운 부분을 모아 다발로 묶거나 말갈기로 구두솔처럼 만든 것인데, 중국에서는 먹솔을 '쇄자(刷子, shua-zi)'라 하여 종려나무의 부드러운 섬유질을 다발로 묶어 사용하였고 일본에서는 '쇄모(刷毛, 하케)'라 하여 말갈기나 사슴털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한 먹이 묻어나도록 종이 위에서 문지르는 도구인 '인체'나 '마렵'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을 '인체'라 하고 말의 갈기로 만든 것을 '마렵'이라 부르는데, 적당한 크기로 뭉치거나 땋아서 그 표면에 밀납(蜜蠟)을 묻혀 놓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도구를 말총으로 만든 '팔자(ba-zi)' 또는 종려나무의 부드러운 섬유다발로 만든 '종피찰(棕皮擦, zong-pi-ca)'이라고 말하며, 일본에서는 죽순껍질로 만든 '바렌(馬連, 馬棟, 皮連, baren)'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이러한 도구의 차이는 한국과 중국에서는 얇은 화선지(畵宣紙)를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아교(阿膠)를 칠한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전자(前者)는 선(線)을, 후자(後者)는 면(面)을 찍기에 적합한 도구이다. (4)

먹(墨)은 유연먹(油煙墨)과 송연먹(松煙墨)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참먹'이라하는 '유연먹'은 식물의 진(津, 樹脂)을 태울 때 발생하는 그으름을 아교(阿膠)와 섞어 만든 것이고 '숯먹'이라고 하는 '송연먹'은 소나무의 그으름을 아교와 섞어 만든 것이다. 목판 인쇄에서는 번짐이 적고 발색(發色)이 좋은 송연먹을 주로 사용하였다. (5) 그리고 보통 자광(紫光)의 먹을 상품(上品)으로 묵광(墨光)을 중품(中品), 청광(靑光)을 하품(下品)으로 여기고 있으며, 질(質)은 가벼운 것으로, 연기는 맑은 것을 취하며, 냄새에 향기가 없고 갈아도 소리가 없어야 최상품의 먹이며, 이러한 먹은 오래될수록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고 한다. 또한 좋은 벼루는 갈아도 소리가 나지 않고 물을 담아 놓아도 줄지 않으며, 먹이 잘 먹고 붓이 상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고 하며, 감포(監浦)와 보령(保寧)에서 나오는 오석연(烏石硯)과 화초문석(花艸紋石)은 중국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하다 한다. (6) 벼루의 좋고 나쁨이야 취향(趣向)에 달렸지만 전통적인 목판의 생명은 질좋은 종이와 좋은 먹에 달려있다.

전통적인 목판화의 방법은 그 대상을 먹으로 칠하고 종이 위를 힘주어 '문지른다'는 대상물의 훼손을 단점(短點)으로 하고 있어 원래의 상태가 보존되어야 하는 암각화 탁본에서는 달리 적용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탁본의 방법도 실상 '뭉치'로 누르거나 두드려서 형태를 얻어내는 방법이기에 이것이 수십차례 거듭되면서 암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야 한다.(7) 일명 마애탁(磨崖拓)이라고도 하는 이 암각화 탁본은 기본적으로 바위에 종이를 덮고 먹을 묻힌 '뭉치'를 두드려서 음각(陰刻)된 형태를 얻어내는 방법인데,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뭉치'를 힘있게 바위 표면에 두드리는 것 보다는 살짝 누르는 것이 오히려 질감표현(質感表現)이 좋아서, '두드린다'는 낱말보다는 '뭉치'로 '눌러서 찍어낸다' 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뭉치'를 감싸는 천은 상당히 고운 '결'과 조직(組織)을 갖고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천의 거칠은 질감이 그대로 찍혀서 보기에도 좋지않은 탁본이 나오기 때문이다.

拓本의 方法

준비 해야할 도구와 재료들

한지(韓紙) 또는 화선지(畵宣紙), '뭉치', 먹(墨)과 벼루(硯) 또는 먹물, 평붓, 넓은 평솔, 좁은 평솔, 분무기(噴霧器), 마른 걸레, 접시, 물과 물통, 테이프, 신문지, 칼 또는 가위

'뭉치'의 제작방법

 

 

1. 각 변의 길이 약 40~50Cm의 정방형(正方形) 비단(緋緞) 또는 순면(A), 그리고 지름 15Cm와 7Cm 정도의 원판(B) 두개를 준비한다. 원판(圓板)은 두꺼운 종이도 상관은 없으나 분유(粉乳) 깡통의 뚜껑같은 질기고 탄력성있는 프라스틱 원판이 보다 적절하며, 부분적으로 탁본을 보강하거나 세밀한 표면 질감을 살릴 수 있는 조그만 '뭉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2. '뭉치'의 주요 머리 부분에 들어가는 곡식은 보편적으로 쌀, 보리, 밀 등의 알갱이 종류(C)이면 무엇이든 상관없으나, 보리알은 강도(剛度)가 약해서 금방 부스러지고 찍혀지는 반점(斑點)이 불규칙하여 피하는 것이 좋다. 또한 좁쌀도 준비하여 세밀한 탁본에 쓰도록 한다.

3. 준비된 비단을 펼치고 천 중앙에 쌀과 원판을 덮는다. 쌀의 양은 원판과 함께 묶었을 때, 약간 도톰하게 반구형(半球形)이 될 정도이면 적당하다.

4. 원판 바로 위에서 준비된 고무줄(D)로 단단하게 묶는다. 비단으로 싸여진 쌀과 원판 사이가 전혀 빈틈이 없고 주름이 없어야 탁본할 때 규칙적이고 보기좋은 반점(斑點)이 형성된다. 또한 '뭉치'를 두드리다 보면 쌀알이 원판 위로 넘어가면서 쌀주머니에 공간이 생기고 천의 주름이 찍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보완(補完)하고자 우선 면(綿)으로 쌀을 단단하게 묶고 다시 원판과 비단으로 감싸면 이를 해결할 수 있으나 두 겹의 천으로 인하여 약간 둔탁한 반점(斑點)이 형성되고 모서리가 둔탁하게 찍히는 단점(短點)이 있다.

5. 원판 위로 솟아있는 천의 나머지 부분은 손잡이로 사용할 수 있게끔 고무줄로 동여매고, 좀더 굵은 손잡이를 만들고자 할 때는 원통(圓筒)이나 보조대(補助帶)를 덧붙이도록 한다. '뭉치'를 두드리다 보면 이러한 가느다란 손잡이는 사실상 매우 불편하고, 그만큼 손목의 힘도 많이 소요된다. 필자는 단지 손의 예민한 감각으로 '뭉치'를 조절하고자 하여 불편하지만 이러한 간이 손잡이를 사용하는데, 이보다 더욱 편리한 손잡이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생산되는 '바렌'은 원판과 머리 부분 전체에 손의 힘이 골고루 전달되게끔 죽순껍질로 원판을 감싸고 그 양끝을 연결하여 원판을 가로지르는 손잡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렌의 손잡이는 수평으로 놓여진 목판(木板)을 문지르기에 적당한 것으로서 세워져 있는 암각화면과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6. 탁본을 하다보면 종이(E)의 물기가 쌀에 스며들고 이것이 종이 표면의 펄프와 먹물과 혼합되면서 끈끈한 풀기를 만든다. 그래서 자칫하면 바위(F) 표면에 붙어있는 종이가 '뭉치'에 달라붙는 경우도 생기며, '뭉치'의 표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이런 문제에 대비하여 '뭉치'를 여러개 준비할 필요가 있고, 또한 탁본 후에 필히 '뭉치'를 분해(分解)하여 천을 세탁하고 쌀을 말려야만 다음에 작업할 때 질감(質感)과 윤곽(輪廓)이 잘나타난 탁본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번거로움은 '바렌'도 마찬가지여서 '바렌'이 넓은 폭의 천연 죽순(竹筍)껍질을 원판에 씌워서 사용하기 때문에 대여섯번 정도 사용하면 표피(表皮)가 마모되어 별 쓸모가 없게 되는 단점이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이 쌀'뭉치'는 비록 쌀을 감싼 비단을 자주 세탁해야 하지만 탄력성(彈力性)과 흡수성(吸水性), 또한 접촉 부분의 가변성(可變性)으로 인해 다양한 인쇄에 응용(應用)할 수 있으며, 표면이 거친 암각화 탁본에는 그지없이 훌륭한 도구인 것이다.

종이의 附着

 

각화는 보통 요철과 균열이 심한 바위의 평평한 면에 새겨져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크게 보아 화강암(火崗岩)과 이암(泥岩) 그리고 사암(砂岩)등 세 종류이며, 오랜 풍화작용에 의하여 깊은 요철이 생기거나 부분적으로 판면이 넓게 떨어져 나가 종이를 붙이기조차 곤란한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주로 동네 문방구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하얀 닥(楮)나무 한지(韓紙)를 사용하였는데, 종이의 크기도 적당하려니와 쉽게 구할수 있는 장점이 있어 종종 이용하곤 한다. 닥(楮)나무의 하얀 섬유질이 종이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상관은 없으며, 보다 깨끗한 탁본이 필요하다면 화방(畵房)이나 지업사(紙業社)에서 닥나무로 만든 화선지(畵宣紙)를 구입하여 사용토록 한다. 될 수 있는 한 질기고 얇은 종이를 택하는 것이 우둘두툴한 표면을 감싸기에도 적당하고 잘 찢어지지 않으며 약간의 물기로도 쉽사리 바위에 달라붙는다.

필자는 주로 해가 있는 맑은 날에 탁본하였는데, 햇살이 없는 경우 바위면에 살포(撒布)한 물기가 쉽게 마르지 않아 먹이 번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더운 여름철 한낮에는 종이와 바위 표면에 뿌려논 물이 쉽사리 마르기 때문에 소규모로 빠른 시간 내에 작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역시 탁본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는 봄, 가을로서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면서 맑은 날씨가 연속되어 여유있게 작업할 수 있는 계절이다. (8) 탁본하고자 하는 바위면에 준비한 종이를 대어보고 재단(裁斷)한다. 암각화 대부분이 평평한 암면 만이 아니라 바위 꼭대기나 옆면에도 새겨져 있으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바위 가장자리에 오히려 특별난 선이나 이미지가 아주 얄팍하게 새겨져 있는 사례도 발견된다. 이 모든 것이 암각화와 상관이 있는지라 애초에 바위 옆면까지 고려하여 종이를 씌울 필요가 있다.

탁본할 부분의 약 1.5배 정도의 범위에 분무기로 물을 골고루 살포하는데, 물이 충분하게 적시어 졌다고 판단되면 그 위에 종이를 덮고, 바람에 종이가 날리지 않을 정도로 가장자리에 접착 테이프를 붙인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마른 바위 표면에 곧 종이를 붙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종이는 금방 마르지만 바위면에 제대로 붙지 않으며, 먹점(墨點)이 실수로 바위표면에 칠하여졌을 때, 바위에 흔적이 남게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필자는 바위에 우선 물을 살포한 다음, 종이 위에 다시 분무기(噴霧器)로 물을 뿌리는데, 중앙에서 부터 뿌릴지 꼭대기에서 부터 뿌릴지는 바람과 바위 표면의 상태에 따라 결정한다. 종이 전면(全面)에 물을 뿌리면 바위 표면이 불투명하게 보이면서 종이가 바위면에 달라 붙는다.

넓은 면적의 암각화를 한꺼번에 탁본할 경우, 비석과 비슷한 반반한 바위 표면이라면 여러 장의 종이를 한꺼번에 이어 붙여 놓고 물을 뿌려도 별 어려움없이 제대로된 탁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워낙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요철의 깊이가 갖가지일 경우에는 한장씩 물을 뿌려가며 붙여가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렇지않으면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에서는 탁본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찢어지며, 아니면 매우 조심스럽고도 위험천만하게 종이를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지(韓紙)에서는 종이가 마르고 난 후 원래 크기에 비해서 가장자리가 대략 0.5Cm 정도는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그 중간을 약 1Cm 이상으로 넉넉하게 겹치게 하는 것이 중간에 틈이 생기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것이다.

또한 4, 5m 이상의 넓은 면적의 암각화를 탁본하고자 할 때는 한 장씩 부착시켜야 하는데, 이 방법은 방에 벽지를 도배(塗褙)하는 방법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전체를 부착시킨 후에 다시 한번 골고루 물을 살포하여 종이 전체가 비슷한 습기(濕氣)를 머금도록 유의하여야 하며, 채탁할 부분 이외에는 두꺼운 종이나 담요로 덮어 수분이 증발하지 않게끔 한다. 종이가 바위에 붙어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물의 점착성(粘着性) 때문인데, 수분이 증발하여 종이가 말라버리면 점착도(粘着度)가 떨어지면서 탁본 도중에 종이가 바위 표면에서 들뜨게되어 형태가 이중(二重)으로 찍히거나 어긋나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미 먹점이 찍힌 부분에다 물을 뿌릴 경우, 먹점이 번져 탁본을 그르치게 되니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부착할 필요가 있다. 단 한 장의 종이로 탁본할 때는 별 문제가 없으나 여러 장을 겹치면 겹칠수록 그 만큼 경험이 필요하고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기서부터 가장 힘들고 중요한 작업이 시작된다. 암각화 탁본은 종이에 먹이 얹히기 전에 종이가 바위의 겉 표면처럼 바위면에 달라 붙어있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구멍과 틈새, 요철(凹凸)의 깊이가 심하여 종이가 찢어지거나 접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정도가 약하다면 개의치말고 먹점이 찍혀야 할 부분까지는 구석구석 종이가 완전하게 달라붙도록 걸레에 힘을 가하면서 종이를 바위 면에 압착시킨다. 간혹 너무 힘을 가하면 종이가 다시 걸레에 묻어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매우 조심스레 밀착시키며, 이런 경우 다시한번 분무기로 물을 뿌리거나 평붓과 평솔로 톡톡 두드리면 효과적으로 붙게 된다. 걸레로 누르면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다시 걸레로 누르는 부착과정을 계속 반복하여야 가까스로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에 한꺼풀 막이 씌워지듯 종이가 붙게된다.

종이의 부착은 실상 암각화 채탁에서 가장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는 과정으로서 채탁시간의 대부분이 여기에 소요된다. 항시 종이 전체의 습도를 균형있게 유지시켜야 하는데, 시간을 지체할 때에는 종이의 한쪽 부분이 마르면서 커다란 주름이 잡히거나 종이의 각 부분마다 신축정도(伸縮程度)가 달라져 원래의 암각 형태와 부분적인 차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바위들이라 먼지와 이끼가 덮여있을 터인데, 이를 물걸레로 닦거나 긁어내면 오히려 표면이 손상될 염려가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문지르지 않고 부드러운 솔로 털어서 종이를 덮도록 하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이끼가 바위면에 그대로 남아있을 경우 바위 표면에 풍화(風化)를 촉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이가 제대로 밀착되지 않는다.(9)

종이를 바위에 밀착시켜 덮으면 표면에 남아있는 물기는 대강 마른걸레에 흡수되고 종이가 하얗게 변하면서 마르기 시작한다. 손으로 종이를 만져보면 대략적인 종이의 습기를 측정할 수 있는데, 종이가 하얗게 변하고 그 표면에서 약간의 습기가 느껴지면 곧 '뭉치'로 작업하여야 한다. 우선 넓은 '뭉치'로 중요치 않은 부분부터 이곳저곳 누르면서 본격적인 탁본이 시작된다.

'뭉치'에 묻혀진 먹이 처음에는 뭉쳐있는 경우가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암각이 없는 부분이거나 아니면 중요치 않은 부분부터 누르는 것이 자칫 일어날 수 있는 실수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게 되며, 또한 화면 이곳저곳을 드문드문 누르면서 차츰 찍힌 부분을 넓혀나갈 때, 화면 전체의 명암(明暗)이 조화롭게 조절될 수 있다. 즉, 부분 부분 집중하여 누르게되면 화면 전체의 명암이 흩어지게 되어 평면의 느낌이 없어지고 각 부분들의 깊이가 달라져 보이게 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의하여야 할 점은 '뭉치'로 찍어논 먹자국의 가장자리가 돋보이지 않게끔 '뭉치'의 머리 중앙에 먹을 묻혀야 한다는 점이다. 중앙에 먹을 바르고 다른 '뭉치'를 준비하여 서너번 마주하여 치게되면 뭉쳐있는 먹이 적당한 면적으로 퍼지면서 찍기 적당한 상태가 된다.

먹은 앞서 소개하였듯이 발색과 보존, 배접을 고려하여 가급적이면 좋은 먹을 사용하는 것이 좋으며, 현지에서 먹을 갈아 채탁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담이 크므로 채탁하기 전 날 미리 먹물로 만들어 준비해야 한다. 먹을 잘게 부수어 갈아서 쓰는 방법도 있으며, 시중에 시판되는 먹물을 사용하여도 문제될 것은 없으나, 될 수 있는 한 고급 서도용(書道用) 먹물을 구입하여 사용토록 한다.

습탁과 건탁

탁본의 방법에는 물을 사용하는 습탁(濕拓)과 물을 사용하지 않는 건탁(乾拓) 두 가지의 방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탁본이라 함은 습탁을 일컬으며, 건탁도 간혹 사용하기는 하지만 반반한 비석과는 달리 암각화에서는 표면이 매우 거칠고 굴곡이 심하여 종이를 물로 적시어 바위에 덮는 습탁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濕拓

탁(濕拓)은 종이의 적당한 습기를 유지하면서 탁본하는 방법으로서 자칫 메마르고 거친 질감으로 인하여 윤곽이 흐트러지게 보일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며 먹점이 살짝 퍼지면서 풍부한 농담(濃淡)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화강암(花崗岩)에 새겨진 암각화의 경우 바위의 굵은 알갱이들이 암각의 윤곽을 흐리게 하는데, 이 방법으로 채탁하면 나중에 솔로 가필(加筆)할 필요가 전혀 없고 원래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윤곽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탁본 도중 바위 표면과 종이의 습기가 완전하게 마르면 종이의 신축성으로 인하여 형태가 이중으로 찍히는 단점이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빠른 시간 내에 작업을 끝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암각화가 수직면이나 가파른 경사면에 있어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물기를 머금은 정도가 다르니 유의하여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먹을 바른 '뭉치'를 종이에 누르기 전에 가급적 손바닥으로 종이의 이곳저곳을 대어보고 분무기를 사용하여 미리 습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아니면 바위 윗쪽의 마른 부분부터 '뭉치'로 누르기를 시작하여 점차 아래부분으로 전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다. '뭉치'로 살짝 누르다 보면 먹이 마르면서 질감과 윤곽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힘있게 두드리게 되는데, 될 수 있는 한 자주 먹을 찍어 눌러야 한다. 마구 두드리다보면 종이가 '뭉치'에 붙어 떨어져 나오게 되며, 종이의 습기 또한 금방 마르게 된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어느 정도 먹을 묻혀 눌러야 할 지는 사실 경험과 감각으로 아는 만큼 수차례의 연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부분 부분 연결하여 채탁할 경우 채탁한 부분들이 약 10Cm 이상 겹칠 수 있게끔 각 장의 채탁 면적을 넓힐 필요가 있다.

'뭉치'는 앞서 제작방법을 소개하였듯이 대략 지름 7Cm 에서 15Cm 정도의 원판에 쌀 등의 재료를 같이 묶어 만든 것으로 이 '뭉치'에 먹을 살짝 적시고 한두번 신문지에 찍어 먹점이 골고루 찍히는지 시험을 해본 다음, 바위면에 덮여진 종이에 이곳저곳 살짝살짝 누르기만 하면 된다. 또는 두개의 '뭉치'를 준비하여 한쪽 '뭉치'에 먹을 묻히고 다른 '뭉치'를 마주하여 두세번 두드리면 양쪽 '뭉치'의 머리 부분에 골고루 먹이 묻게 된다. 이 두개의 '뭉치'를 사용하여 번갈아 가면서 종이 위를 누르면 균일한 농담(濃淡)의 먹이 찍히게 된다. 그리고 암각화는 겹쳐져서 새겨진 경우도 종종있으며, 그 요철의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한가지 종류의 '뭉치' 보다는 굵은 것, 가는 것등 여러 종류의 '뭉치'로 상태를 보아가면서 눌러야 할 때가 많다.

채탁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보이지 않던 선(線)이나 형상(形象)이 드러나는 경우가 생긴다. 주로 정면(正面)으로 비추어진 광선(光線)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는데, 이럴 경우 그 형태를 세심하게 찾으면서 먹(墨)을 살짝 적신 구두솔과 같은 부드러운 평솔(10)로 그 윤곽을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으며 처음부터 소홀하게 취급한 부분이기에 채탁이 끝난 후, 다시 한번 부분적으로 채탁하여 보충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그리고 풍화가 심하여 형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암각화나 부분적으로 우둘두툴 융기된 돌기에 의하여 빈 공백이 생길 때, 또는 움푹한 곳에 조각이 되어 정확한 윤곽이 나오지 않을 때는 '뭉치' 보다는 '평솔'이 효과적이며, 성긴 질감으로 엉성하게 보이는 탁본을 이 '평솔'로 보충하면 잔 먹점이 촘촘하게 펼쳐지며 윤곽(輪廓)이 살아나고 명암(明暗)의 균형이 이루어진 밀도(密度)있는 탁본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된 '뭉치' 이외에 판화에서 자주 쓰이는 '롤러(Roller)'를 이용하여 채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롤러에 묻혀진 먹이나 물감이 골고루 퍼지지 못하고 진득하게 덩어리지어 찍히며, 롤러의 가장자리가 짙게 찍혀지는 단점이 있어 피하는 것이 좋다. 더군다나 물감이 종이를 투과하여 바위 표면을 더럽히게 되며 특히 기름 성분(油性)의 물감은 암각된 바위 표면에 스며들어 씻을 수 없는 오점(汚點)으로 남게되니 절대적으로 피하여야 한다.

乾拓

탁(乾拓)은 가장 손쉽게 채탁할 수 있는 임시방편 (臨時方便)으로서 건탁용(乾拓用) 먹(11) 또는 먹지 등의 검정이로 문질러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습탁의 준비를 못하였을 때 부분적으로 간단하게 채탁할 수 있는 이점(利點)이 있다. 주로 표면이 매끈한 이암(泥岩)이나 점판암(粘板岩) 종류의 바위에 각인(刻印)된 암각화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습탁에서 사용하는 닥나무 한지나 또는 얇은 미농지(美濃紙)나 노루지 그리고 여러 장의 먹지(墨紙)와 손수건, 접착 테이프를 준비하면 된다. 채탁할 부분에 종이를 덮어 접착 테이프를 단단하게 붙이고 손수건으로 살짝 문지르면 음각된 형태를 따라 약간의 요철이 드러난다. 그 다음 먹지를 덮고 그 위에 손바닥을 펼쳐 원을 그리면서 문지르면 그만인데, 될 수 있는 한 손가락이 먹지에 닿지 않게끔 하고 손바닥의 두툼한 언덕으로 문질러야 균일한 농담의 먹색이 묻게된다.

이러한 건탁은 신중하게 사용하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으나 먹지 이외의 연필이나 콘테 등 단단한 덩어리의 검정이를 사용하였을 때에는 바위 표면이 손상될 염려가 크며, 또한 검정이를 문지르면서 형성되는 검정이의 가장자리가 원래의 요철보다 두드러지거나 불규칙한 명암이 형성되는 단점이 있어 오랜 풍상으로 문드러진 요철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더더구나 불가능한 방법이니 가급적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褙接 및 保管

 

요한 만큼의 탁본이 끝났다고 판단되면 종이를 뜯어내야 하는데, 매끈한 표면에서는 약간 젖은 상태에서도 살살 뜯어낼 수 있으나, 울퉁불퉁한 표면에 씌워논 종이는 군데군데 마르지 않은 곳도 있기 때문에 뜯기 적당한 시기까지 마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종이의 색갈이 밝은 흰색이고 약간 눅눅한 상태이면 뜯어도 상관없으나 화강암 재질의 경우 종이가 바위 표면의 돌기를 감싸면서 붙어있어 잘못할 경우 찢어질 염려가 있다. 공들여서 채탁한 종이를 한 순간 실수로 인해 찢어지게 하면 완벽한 작품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암각화의 탁본 일부분이 망실(亡失)될 수도 있으므로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뜯어낸 종이는 다시 한번 햇볕에 완전히 말리거나 그렇지못할 상황이라면 비닐이나 기름종이에 싸서 안전한 장소로 옮긴 후 완전하게 말려야 한다.

채탁에 심혈(心血)을 기울인 만큼 보관을 철저히 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채탁 후 곧 배접(褙接) 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이 종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에 일반적인 배접에 비하여 상당한 기술을 요구하는데, 배접(褙接)이나 표구(表具)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표구사(表具社)에 맏기면 그만이지만 사정상 개인적으로 배접하고자 할 때는 다시한번 배접에 관한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채탁된 종이를 원통처럼 말아서 공기가 잘 통하는 응달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또한 먹의 선명도(鮮明度)를 유지시키거나 종이의 색상이 오랫동안 바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는 채탁할 때 명반(明礬)을 약간 풀어논 물을 사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하겠다.

맺는 말

자(筆者)가 답사(踏査)하여 채탁한 암각화 소재지역은 영일 칠포리, 경주 석장동, 영천 보성리, 고령 안화리, 남원 대곡리, 함안 도항리로서 각 장소마다 최소한 4시간에서 7시간 정도 작업시간이 소요(所要)되었다. 경주 석장동의 경우 그 범위가 넓고 분산되어있어 부분 부분 채탁하였으며, 기타의 장소에서도 사정에 따라 부분 채탁하거나 한꺼번에 바위 전체를 종이로 덮어놓고 채탁하기도 하였다. 암각화에 대한 관심만 갖고 있던 필자가 선뜻 암각화 탁본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각종 판화를 다년간 제작하였던 경험이 탁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경험이 뒷받침이 되어 채탁하면서 발생되는 문제점을 그때그때 해결할 수 있었으며, 목판의 기술을 암각화 탁본 특유의 상황에 맞추어 응용(應用)하여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채탁의 방법은 실상 간단한 것으로 요철(凹凸)을 종이에 박아내면 그만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 작업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는 다시금 바위에 요철을 조각(彫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었다.

암각화 탁본은 일반적인 금석문(金石文) 탁본과는 다르게 육안(肉眼)으로 제대로 확인하기 힘든 암각화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어 암각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얻고자 쓰이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암각 부분에서는 윤곽을 강조해야 하고, 원래의 자연적인 풍화나 균열부분에서는 적당하게 처리한다든지 하는 채탁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으며, 그만큼 채탁자의 선입관(先入觀)이나 생각에 따라 채탁된 상태가 달리 나올 수 있는 문제점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최소화시키고자 가급적이면 넓은 면적의 '뭉치'를 만들어 사용하지만 본래 바위가 지니고 있던 굴곡이나 균열부분 등에서 얄팍하게 새겨논 암각은 어쩔 수 없이 조그만 '뭉치'로 해결하였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주관(主觀)을 배제한다하더라도 최소한의 채탁자의 의도(意圖)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의 암각화의 제작자들이 인위적(人爲的)으로 다듬어논 평면에서 작업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적에 부합하는 바위면을 선택하여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이용하였기에 여러 층으로 구성된 암각화도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바위 옆 면에 선각(線刻)된 경우도 흔하다. 한마디로 바위와 바위를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환경까지 바위에 속한 듯이 입체적(立體的)으로 표현되어있는 것이 암각화인 것이다. 정성들여 쪼으고 수없이 다듬으면서 형성되었던 암각화는 그 제작 과정에서 이미 바위와 혼연(渾然)되어 하나의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독립된 개체(個體)로서 신성(神聖)하게 다루어졌으며 그만큼 암각화의 목적과 의미조차 바위 속에 담겨져 있다 할 수 있다.

입체적인 대상이 단순한 평면으로 전환되면서 결국 그 바위의 한 단면 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암각화의 탁본은 원래 암각화에 담겨진 의미나 분위기가 상실되거나 축소되고 오히려 채탁자의 감각(感覺)이 가미된 새로운 예술적 작품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비록 암각화 탁본의 목적이 형태 확인이라는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과정에서 개입(介入)되는 주관(主觀)에 의해 이미 판화(版畵)나 회화(繪畵)같은 예술적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12)
(1997년 4월 작성, 5월 1차 보충, 10월 2차 보충)



1) 탁본(拓本)은 탑본(榻本) 또는 비첩(碑帖)이라고도 말하며, 목판 인쇄에서는 간경(刊經, 看經), 간탁(刊拓), 인출(印出) 또는 사출(寫出)이라고 한다. 암각화 탁본은 마애탁(磨崖拓)에 해당하나 그 대상이 주로 그림이어서 여기에서는 암각화 탁본이라고 칭한다.
2) 炳震 스님은 비석을 탁본할 때, 여러 종류의 먹방망이를 혼용(混用)할 경우 먹점의 색이 고르지 못하다고 한다.
3) '뭉치'는 스님이 제안한 '먹방망이'와 같은 것으로서 전통적인 목판 인쇄에 사용된 '인체'나 '마렵'의 '털뭉치'를 줄인 말이다. '먹방망이'는 암각화 탁본이나 목판 인쇄에서는 의미상 적합하지 않으며 여기서는 쌀을 비단 보자기에 뭉친 '쌀뭉치'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이와 비슷한 도구를 統稱하여 '뭉치'라는 순수 한글말로 부르고자 한다.
4) 구자현(具滋賢), 판화(版畵), 미진사, 1989. 46~48쪽 참조
5) 앞의 책, 53쪽
6) 宋秀南, 水墨畵, 同元社, 1974. 113, 114쪽
7) 1970년대에 발견된 울산 천전리와 고령 양전동 암각화는 그 동안 탁본을 마구 남발(濫發) 하므로서 현재 그 형태가 초기 발견 당시에 비해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훼손이 올바르게 두드려서 된 것인지 아니면 치약 등의 화학제품을 먹과 섞어 바위 표면에 칠하여 찍어내는 비정상적인 탁본 방법처럼 화학적인 작용에 의해선지는 분명하지 않다.
8) 사찰(寺刹)에서의 목판경(木板經)은 판본(板本)의 신축도(伸縮度)가 적고 기후로 인한 손상이 적은 계절인 청명(淸明)과 하지(夏至)사이, 추분(秋分)과 입동(立冬) 사이를 택하여 인출(印出)하고 있다. (炳震, 拓本의 世界, 一志社, 1991. 63쪽)
9) 오래된 비석을 탁본할 경우, 일이년에 한번 정도 명반이나 청궁을 물에 달여서 탁본에 사용하는 물에 엷게 타서 채탁하면 비석에 이끼가 끼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며, 탁본의 먹색이 진하게 나온다. (앞의 책, 98쪽) 또한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끼가 오랫동안 붙어있던 바위의 표면이 주변에 비해 약 2~3mm 정도 깊이까지 들어가 있음을 본 적이 있다.
10) '우끼요에(浮世繪)' 목판화의 경우, 말갈기로 만든 구돗솔과 같은 모양의 넓은 평솔(丸刷毛, 마루바케)과 여름철에 채집한 사슴털로 좁은 평솔(手刷毛, 테바케)을 만들어 사용한다.
11) 건탁용(乾拓用) 먹(墨)은 납과 같은 광택이 있는 검고 부드러운 연(軟) 광물질인 먹용(墨鎔)을 단련해서 굳힌 고형(固形)의 먹이다. (拓本의 世界, 18쪽)
12) 탁본의 독보적(獨步的)인 세계를 구축(構築)한 炳震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탁본은 모사(模寫)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세계인 것이다. 한 사람의 창작에 의해 저(著), 서(書), 각(刻)된 내용이 하나에 다 나타나 표현되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며 개성예술인 것이다. 글을 쓰고 짓고 그 글을 비에 새겨 이를 채탁함으로써 이 탁본 하나에 많은 사람의 예술세계가 혼연일체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 (앞의 책, 96쪽)